20151019 영광의 자리와 종의 자리 – 막 10:35-45
우리는 몇 주전 말씀을 통해 누가 큰 지 다투는 제자들의 모습을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십자가 고난을 예고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해하지 못하고 묻기조차 두려워하던 그들이
정작 길에서는 누가 더 큰 지 서로 논쟁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뭐라 말씀하셨습니까?
막 9:35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어야 하고 뭇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서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고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라는 말씀까지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야고보와 요한의 질문은
어린 아이까지 데려다가 설명하신 예수님의 수고를 무색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보기 전에 대체 이 야고보와 요한이 누구인지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막 1:19-20 에 보시면 예수께서 이 둘을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이들은 어부였고 그 아버지 밑에서 일했습니다.
말씀에서 말하듯이 그 아비 세베대는 배를 가지고 있었고 품꾼을 부리고 있었으니까 제법 부자 어부였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 역시 그 아비 밑에서 품꾼들을 부리면서 일했을 것입니다.
매사에 자신감이 있었고 거침이 없었을 것이라 추측해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흔히 말하듯 괄괄한 성격, 즉 좀 세고 급한 성격이었겠지요.
이를 뒷받침 하는 것이 마가복음 3장에 나옵니다.
열두 제자들의 이름이 나열될 때 이 야고보와 요한은 보아너게 라는 별칭이 붙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보아너게는 우뢰의 아들이라는 뜻인데요 예수께서 그 이름을 붙이셨다고 합니다.
우뢰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십니까?
네, 굉장히 급하고 강하고..
그런데 그 아들이라 하니까 평소 그들의 성격이 어떠했는지 우리는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괄괄한 성격의 소유자인 야보고와 요한이 예수께 뭐라고 요청합니까?
일단 전제부터가 강합니다.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예수께서 아무리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설교하시면 뭐합니까?
그의 제자들이 지금 요구한다는 것이,
‘무엇이든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우리에게 주셔야 합니다!’
반 협박조로 들리지요?
이들이 구한 것은 이렇습니다.
“37.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쉽게 얘기하면,
‘나중에 주님이 왕 되시면 우리 좀 주요 보직에 앉혀주세요.’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내용 아닙니까?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는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고백했던 베드로가
십자가를 지신다는 예수님의 말에 버럭 화를 냈다가 도리어 혼이 났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예수와 왕 노릇 하려던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 앞에 깨집니다.
막 8:3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그런데 아직 멀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여전히 자리 다툼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자리 다툼이 더 안타까워 보이는 것은 오늘 본문 바로앞에서 십자가 수난 예고가 있은 바로 뒤에 이런 요구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시지요.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예수의 영광은 십자가를 통과하여만 얻어질 영광이었습니다.
한 관주 성경의 해설대로,
십자가를 짊어짐으로써 인간에게 쏟아질 하나님의 분노의 잔을 대신 마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짊어짐으로써 죽음의 강으로 들어가 버리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가 마시고 받을 잔과 세례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십자가는 전혀 개의치 않고,
그 잔과 세례의 의미는 전혀 알지 못한 채
후에 얻어질 영광만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괄괄한 성격대로 대답은 시원하게 합니다.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허락하십니다
하지만 좌우편의 자리는 약속하지 않으십니다.
천국의 보상은 하나님께 달려 있기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야고보와 요한의 당돌한 요구 소동이 끝난 듯 했습니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나머지 열 제자가 발끈합니다.
왜 화를 냈을까요?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의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고 철부지 같은 소리를 한다고 화를 냈을까요?
그런 거룩한 분노였다면 다행이었겠습니다만,
실속은 그들 속에 있는 시기와 질투가 일어난 것입니다.
다들 밖으로 말만 안 했을 뿐 속으로는 예수 옆 자리는 내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겠지요.
그러니까 예수님 옆 자리를 주세요 라는 야고보와 요한 형제의 요청은 자신들의 자리를 탐내는 것으로 비춰졌을 겁니다.
결국 예수께서 정리를 해 주십니다.
42절 말씀인데요,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새번역 성경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너희가 아는대로, 이방 사람들을 다스린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백성들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백성들에게 세도를 부린다.”
하지만 예수께서 일러주시는 가치관은 세상의 것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요구했던 요지는 무엇입니까?
예수의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는 말은 곧 큰 사람이 되고 모든 사람 위에 으뜸이 되겠다는 말이잖습니까?
그들의 헛된 꿈을 예수께서 다시 한 번 가차없이 깨뜨려주신 것입니다.
너희가 이방 관리들처럼 백성들을 탄압하고 권세를 휘두르는 사람이 되고자 하느냐
아니다,
너희 중에 정말 큰 사람이 되려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라
으뜸이 되고 싶으냐
그렇다면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라
항상 자신만만하고 괄괄하던 야고보와 요한의 코가 납작해졌을 겁니다.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지요.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다시 한 번 십자가의 참 의미를 알려주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본인의 말처럼 예수께서는 자신이 섬김을 받으려고 하지 않으셨어요.
이 땅에 계신 동안에도 이 곳 저 곳을 돌아다니시면서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보살피셨어요.
병이 낫고 귀신이 나가고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자 할 때에도 때가 이를 때가지 그러지 말도록 경계하셨어요.
제자들의 스승이라고 좋은 곳에서 좋은 음식을 먹으려 하지 않으시고 제자들과 똑같이 먹고 자고 하시면서 그들에게 가르침을 주셨어요.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어요.
그리고 끝내 십자가에서 고난의 잔과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우리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는 섬김 중의 섬김을 보여주셨어요.
요즘 인터넷 말로 끝판왕이라고 합니다.
최고 중의 최고라는 말이죠.
예수님은 바로 이 섬김의 끝판왕 이셨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때로 우리 야고보와 요한처럼 영광의 자리에서 어깨를 으쓱거리기를 바라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만 성도 몇 중의 우두머리가 되고자 가슴을 펴고 있지는 않습니까?
저 자신조차도 돌아보면 남 앞에 서고 칭찬 받는 자리는 좋아하지만 예수 십자가의 깊은 세계는 온 몸과 맘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때때로 보게 됩니다.
영광의 자리는 내가 가고 싶다고 가는 것이 아니고
세상 부귀 명예 자랑 버리고 섬길 때
주께서 주시는 자리입니다.
예수님 본받아 뭇사람을 섬길 때 주께서 주시는 자리입니다.
우리 더 이상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노래에 만족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 난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어 / 난 보살핌 받아야 돼.
네 맞지요.
그러나 사랑 받는 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섬겨야 할 때입니다.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주신 예수의 섬김과 사랑을 본받아 사랑하고 섬겨야 할 때입니다.
주의 귀한 사랑이 여러분의 결단과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