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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5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막 10:46-52

https://vimeo.com/151609990

오늘 이야기가 펼쳐진 지역은 여리고 입니다.

이 여리고는 성경에서 꽤 중요한 지역인데요

바로 이스라엘 역사의 가장 큰 사건인 출애굽 역사의 큰 획을그은 곳이기에 그렇습니다.

여리고는 가나안을 가기 위해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관문이었습니다.

하지만 크고 강한 그 도시를 무너뜨리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무 오합지졸이었습니다.

어찌할까 고민하고 걱정하던 여호수아 앞에 하나님의 군대장이 나타납니다.

신을 벗고 땅에 엎드린 여호수아에게 하나님 말씀하십니다.

‘제사장을 앞세워 온 백성들과 함께

첫째날부터 여섯째날까지 매일 한 바퀴씩 돌고

마지막 일곱째날 일곱 바퀴를 돌아라

마지막 돌 때 제사장들은 큰 나팔을 불고 백성들은 큰 소리로 외쳐라’

그곳에서 여호수아는 말씀에 순종해서 백성들과 총 13번을 돌았고 마지막에 나팔 소리와 함께 소리를 외쳤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성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도저히 상식적으로는 납득이 가지 않는 방법이었지만 순종하고 그대로 따랐을 때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서 소중한 첫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즉, 믿음의 승리를 거둔 곳이 바로 여리고 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바로 그 곳, 여리고에서의 또 다른 믿음의 승리를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지난 주 우리는 예수님 옆 자리를 달라고 떼쓰다가 섬김의 본을 배운 야고보와 요한의 이야기를 살펴보았는데요,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도착한 곳이 여리고 였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라고 시작하지요?

그리고 다음 문맥을 보시면 예수께서 여리고에서 나가실 새라고 말합니다.

여리고에 왔다가 바로 나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만

거기에 “허다한 무리와 함께” 라는 표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그 곳에서 많은 사역을 이미 하셨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병이 낫고 문제가 해결되었고 또 그렇게 해결되길 바라는 사람들이 예수와 제자들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북적북적 움직이는 가운데 그 사람들의 소리를 유심히 듣고 있는 사람이 있었어요.

바디매오 라는 거지였습니다.

맹인입니다.

볼 수 없기에 그의 귀는 더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여리고에서 허다한 무리가 예수를 따라다녔으니 그에 대한 소문은 이미 이 바디매오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 그도 앞을 볼 수 있었다면 진작 예수를 찾아 다녔겠지요.

평생의 그의 소원을 예수가 이뤄질 수 있다는 꿈을 꾸었을 것입니다.

바로 눈을 뜨고 앞을 보는 것.

잘 보는 사람들에게야 별 거 아닌 소원 같지만

평생 앞을 못 보고 살아온 사람에게 가장 바라는 소원은 바로 앞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문으로 듣기로 예수라는 자가 무슨 병이든 다 고친다는 겁니다.

그의 소원이 더 확실해 집니다.

‘그래! 예수를 만나면 내가 눈을 뜰 지도 모르겠어.’

바로 그 때 그의 앞에 한 무리가 지나가는데 그 무리의 중심에 예수가 있다는 거에요.

망설일 이유 있습니까?

소리를 지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의 외침이 중요한 이유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수식어가 그저 잘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성경의 예언된 대로 이 땅에 오신 메시아라는 말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맹인 거지가 어떻게 이런 것을 알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확실한 것은 이것을 자신의 믿음으로 선포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의 외침이 마가복음에서 예수를 다윗의 자손으로 인정한 첫 번째 선포가 됩니다.

그 다윗의 자손 예수께서 바로 다음 장인 11장에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기 때문에 맹인 바디매오의 외침은 더 큰 의미를 가집니다.

하지만 예수를 따라다니는 많은 사람들은 이 깊은 의미를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저 시끄러운 소음이라 생각하고 바디매오를 꾸짖습니다.

하지만 바디매오는 그치지 않았습니다.

다음 기회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겠지요.

더 큰 목소리로 예수를 부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께서 멈춰 서십니다.

바디매오를 부르십니다.

꾸짖던 사람들이 그를 부릅니다.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우리는 이제 이 맹인의 행동을 눈 여겨 볼 것입니다.

50절에 예수께서 부르신다는 소리를 듣고 바디매오가 어떻게 합니까?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갔다고 묘사합니다.

겉옷을 내버린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아시는 바와 같이 맹인입니다.

거지라고 본문은 소개합니다.

거지이고 맹인이니 그에게 가진 짐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많이 가졌던들 관리하기 힘들었을 테지요.

그러니까 그가 가지고 있던 겉옷은 추우면 걸치고 구걸할 때 자리에 깔고 앉는 그의 재산 1호 이었을 것입니다.

입고 있는 옷 빼고는 전 재산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겉옷을 예수가 부르신다는 한 마디에 완전히 내 팽개치고 달려가는 거예요.

그리고 뛰어 일어났다고 표현합니다.

보통 누가 부를 때 뛰어 일어납니까?

엄마가 아이한테 밥 먹으라고 하면 바로 오는 아이 있습니까?

나와보지도 않고 방에 앉아서 ‘어, 이것만 하고’ 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좋아하는 장난감이나 게임을 사왔다고 나와보라고 해 보십시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달려 나오지 않습니까?

그런 생각을 해보시면 딱 맞을 것 같습니다.

구걸하던 거지이기에 종일 쭈구려 앉아 있었을 겁니다.

다리에 힘이 없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기에 방향 감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뛰어 일어납니다.

그 어떤 선물을 받는 아이보다 흥분되고 상기된 모습으로 일어납니다.

그리고 예수께 나아옵니다.

여러분, 무엇을 느끼십니까?

예수께서 부르실 때 우리는 과연 어떻습니까?

이 바디매오처럼 즉각적이고 간절한 반응을 보이십니까?

나도 장님이었다면 그렇게 간절했을 겁니다 라고 말할 분 계십니까?

그러나 여러분, 어쩌면 우리는 이 장님 바디매오보다 더 못 보는 사람들일 수도 있어요.

영의 눈이 멀어서 내가 어디로 달려가고 있는지도 모른 채 살아가는 게 요즘 우리의 인생 아닙니까?

그러면서도 난 잘 보인다고 그냥 있어요.

예수님 찾아오셔서 부르시는데도, 은혜 주신다고 부르시는데도 난 괜찮다고 뒤로 물러나 앉아 있어요.

이 거지는 자기 가진 거 내버리면서

넘어질 지언정 뛰어 일어나 예수께 달려가는데

우리는 그냥 앉아 있어요.

바디매오가 자기 겉옷 누가 훔쳐갈까봐 안 일어났다면 기적은 없었어요.

그러나 예수께서 부르실 때 그는 내버리고 뛰어 일어났어요.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51절 보시면 예수께서 물으십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다른 말 하지 않았습니다.

인사치레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평생 소원 그거 하나 말합니다.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그리고 그가 곧 보게 됩니다.

아.. 짜릿합니다.

이 거지는 그저 자신이 보고 싶다는 소원을 말했지만

예수는 구원을 선포하셨어요.

단순히 육체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예수를 찾았지만

예수는 전인적인 구원을 허락하셨어요.

이 거지가 헌금을 많이 해서 고침 받았습니까?

이 거지가 예수를 오랫동안 따라다녀서 구원받았습니까?

이 거지가 착한 일 많이 해서 구원받았습니까?

아닙니다.

그의 믿음이 그를 구원했다고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는 나를 치료하신다는 그 간절한 믿음을 주께서 보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에서 믿어서 구원받았으면 다음엔 아무래도 괜찮아 라고 말씀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믿어서 구원받았다면 그 다음은 더욱 중요합니다.

바디매오를 보십시오.

52.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그의 인생은 그저 그의 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끝나지 않았어요.

그저 자기 몸 고침 받은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어요.

진정 모든 문제의 해답이 되시는 예수를 따랐어요.

부모를 찾아가지도 않았어요.

같이 구걸하던 동료에게 묻지도 않았어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바로 그 길에서 예수를 따랐습니다.

이미 자신이 가진 것 내 버렸습니다.

자신의 삶을 연명하던 그 자리를 털고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소원대로 앞을 보게 되었습니다.

덤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와 달리 때로 우리는

덤으로 받은 구원에 감사하고 예수를 따르기 보다

다시 내가 있던 그 자리로 돌아갈 때가 있지 않습니까?

나를 감싸고 있던 그 누더기 겉옷을 걸치고 구걸하려고 할 때가 있지는 않습니까?

구원받으셨다면

믿음으로 구원받은 백성이 되셨다면

그리고 주께 엎드려 여러분의 문제가 해결되고 해결될 것을 믿는다면

예수를 따르십시오.

망설이지 말고

다른 길로 돌아가지 말고

바로 이 길에서 예수를 따르기로 작정하십시오.

허다한 무리가 예수를 따르고 있었지만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던 것이 바디매오에게 선포되었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여러분, 진정 여러분은 구원받았다고 믿으십니까?

예수의 보혈로 구원받았다고 믿으십니까?

여러분의 모든 문제의 해결은 주께 달려 있다고 믿으십니까?

그럼 망설이지 말고

다시 옛 자리로 돌아가지 말고

예수를 따르십시오.

예수를 따르십시오.

우리를 부르시고 인도하시는 그 주님 따라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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