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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08 누구의 본을 따를 것인가 - 막 12:38-44

지난 주 우리가 함께 나눴던 말씀 기억하십니까?

한 서기관이 예수께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고 물었고

예수께서는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주 너의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대답을 들은 서기관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제사보다 낫다고 응수합니다.

주께서는 그 지혜로운 대답을 칭찬하시면서 네가 하나님 나라가 멀지 않다 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질문했던 서기관을 칭찬하셨던 예수님께서 지금은 서기관들을 경계하라 말씀하십니다.

물론 그 질문했던 서기관을 향해 날리신 일갈은 아닙니다.

앞에서도 나누었듯이 그 서기관은 율법 중의 최고가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었어요.

그러나 당시 많은 유대 지도자들, 특히 서기관들은 최고의 율법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는 관심이 없었고

자신들을 뽐내기에 바빴다는 거에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따라 그 상황을 한 번 그려볼까요?

우선 그들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씀합니다.

왜 긴 옷을 입었을까요?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제사장과 레위인에 대한 규례를 주실 때 옷 입는 것에 대한 장면이 나옵니다.

레위기 6장 10절에 보면

“제사장은 세마포 긴 옷을 입고 세마포 속바지로 하체를 가리고…”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긴 옷은 제단 앞에서는 이들의 부정한 것을 가리기 위해 주께서 허락하셨던 방법입니다.

그런데 제사를 위한 기능적 수단을 넘어서서

긴 옷은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임을 나타내거나 무엇인가 신성한 일을 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표시가 되었습니다.[1]

왜 우리도 사극을 보면 백성들은 그저 한복 바지와 윗도리만 입습니다만

선비들이나 고관대작들은 바닥에 끌릴듯한 긴 옷을 입고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나중에는 옷만 보고도 대충 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알 수 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사극에서도 치렁치렁한 빨간 관복을 입고 지나가면서 “휘 길을 비켜라” 하면 모든 백성이 꾸벅꾸벅 엎드리지 않습니까?

지금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지금 딱 그렇습니다.

긴 옷을 입고 시장을 나가니까 사람들이

“아이쿠 하나님의 신성한 일을 하시는 분인가 보다”

“아이쿠 높은 지위에 계신 분인가 보다”

하고 꾸벅꾸벅 인사를 했겠지요.

서기관들이 이것을 즐겼다고 예수님은 꼬집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몇 가지 서기관들의 특징을 발견하게 되는데요,

첫째는 그들의 교만한 습성입니다.

계속해서 이야기하게 됩니다만 예수님 말씀에,

높아지려는 자는 낮아지고 뭇 사람의 종이 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서기관들의 모습이 그렇습니까?

뭇 사람의 종이라고 감히 말하기 어렵습니다.

39절에 보면 회당의 높은 자리에 앉고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서기관들이 뭐 하는 사람들이었나요?

그들은 읽고 쓰는 능력이 탁월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을 기록하거나

해석해서 가르치고

정부의 행정적인 업무를 다루고

가정의 법적인 업무까지 다뤘습니다.

게 중에는 레위인이나 제사장인 경우도 있었습니다.

지식을 전하고 지혜를 깨닫게 하는 이들이 존경을 받아야 하는 것은 맞습니다만

본인이 나서서 나를 존경하라 하면서 가슴을 펴고 배를 쑤욱 내밀고 긴 옷을 질질 끌고 다닌다면 영 꼴불견일 것입니다.

성경을 기록하고 가르친다고 하는 자들이 정작 주께서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겸손에 대해서는 전혀 삶으로 나타내지 못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또 이들은 외식하는 자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까 말씀 드렸듯이 긴 옷이 성경에서 등장하는 것은 주의 제단 앞에서 제사를 지내는 제사장의 옷을 만들 때 입니다.

그러나 지금 긴 옷을 입은 서기관들이 제단 앞에 서 있나요?

시장을 거닐고 있습니다.

그들이 시장에 물건을 사러 왔겠습니까?

겉만 번지르르 하게 시장을 다니면서 인사 받기를 즐겨 하는 그들의 모습은 분명 하나님께서 긴 옷을 입히신 이유가 아니었을 텐데 말이죠.

더욱이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임에도 그 말씀에 나타난 참 뜻을 좀처럼 따르지 못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40 절에 그들이 과부의 가산을 삼킨다고 기록합니다.

그 당시는 남성 중심의 사회였기 때문에 남편 없이 여인 혼자 산다는 것은 매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룻기에 룻과 그 시어머니 나오미가 모압 땅에서 남편들을 잃고 이스라엘로 돌아왔을 때

과부인데다가 이방인이었던 룻은 변변한 직업을 얻지 못하고 남의 밭에 떨어지는 낱알을 주우러 갑니다.

이 것이 당시 과부의 상황을 대변하는 것일텐데요,

지금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서기관들이,

벡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그들이,

이 과부들의 가산을 삼킨다고 합니다.

과부들이 재산이 많아야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설사 있었다고 한들 그것을 꼭 빼앗았어야 할까요?

이 서기관들이 그들의 행태에 대해 변명할 수 없는 것은 구약성경에 고아와 과부를 보호하고 잘 대접하라는 말씀이 매우 많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몇 구절만 살펴보면요,

출애굽기 22:22-23 말씀입니다.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

시편 146:9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

스가랴 7:10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서로 해하려고 마음에 도모하지 말라 하였으나

주께서 지키고 보호하신다는 과부들을 지금 서기관들이 탄압하고 있는 겁니다.

그들의 재산을 가지고 장난치고 있는 거예요.

법을 잘 아는 자들이었으니 상대적으로 사회 약자였던 과부들을 위험에 빠뜨리기는 식은 죽 먹기였겠지요.

그러나 그런 악행을 저지르고도 그들은 회당에 가서 길게 기도한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기도 내용이 나오지 않습니다만

눅 18:11-12 에 한 바리새인이 기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아마 이 기도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교만하고 포악하고 외식하는 자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거운 판결입니다.

읽어드리지 않았습니다만

출애굽기 22:24에 과부와 고아를 해롭게 하는 자들에게 하나님 말씀하십니다.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의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그런데 더 무서운 것은 이 서기관들이 이 말씀을 다 알았다는 거예요.

자신들의 손으로 기록하고 백성들에게 가르쳤어요.

그러나 자신들은 전혀 지키지 않았어요.

자신들의 교만, 욕심, 그리고 허영심에 사로잡혀 진정 하나님 말씀하시는 바를 실천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주께서 왜 서기관들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분명 이들의 모습을 은연 중에 닮아 가려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암시하는 긴 옷을 입고

사람들이 많은 곳을 다니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인사 받는 모습을 좋게 여기는 자들이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가르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동경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지요.

오히려 심할지도 모릅니다.

옷 입은 것으로

몰고 나온 차로

차고 있는 시계로

들고 있는 가방으로 모든 것이 평가돼 버리는 세상이니까요.

사람들에게 높은 사람처럼 인식되고자 가식적으로 꾸미는 우리의 모습은 혹시 없습니까?

제가 지금 일부러 남루한 옷을 입고 다니자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겉을 치장하는 것 때문에 우리 안에 숨쉬고 있는 예수의 말씀이, 그 사랑이 가려지지 않기를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아무리 남을 가르칠 정도로 잘 알고 있으면 뭐합니까?

앞에서는 말씀을 가르치고

뒤로는 과부의 재산을 빼앗는 부조리를 보십시오.

서기관들의 부조리를 고발한 뒤 본문은

헌금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41절에 여러 부자가 많이 넣었다고 말합니다.

본문은 이 부자들이 서기관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만,

이 부자들 중에 서기관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해봄 직합니다.

과부의 가산을 빼앗아 가식적으로 길게 기도하며 많은 헌금을 합니다.

그런데 마침 한 과부도 헌금을 합니다.

가난하다고 했습니다.

이 여인이 와서 헌금한 액수가 얼마입니까?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 입니다.

렙돈은 그리스 식 돈 표기였고

고드란트는 로마 식 돈 표기였습니다.

이 가치는 얼마냐 하면,

당시 일반 노동자 하루 품삯의 1/64 값어치였습니다.

쉽게 계산이 되시나요?

현재 우리나라 시간당 최저 임금은 6,030원입니다.

하루 8시간 일한다고 했을 때 48,240원입니다.

이것을 다시 64로 나눠볼까요?

약 754원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여인은 우리 나라 물가상 과자 한 봉지 사먹기도 힘든 작은 액수의 금액을 헌금으로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때 예수님의 반응을 보십시오.

43절을 같이 읽어보실까요?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44절도 같이 읽어볼까요?

네 그렇습니다.

가난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를 헌금으로 드렸다고 합니다.

자, 그렇다고 해서 이제 모든 소유를 주께 바치십시오 라고 설교를 끝맺는다면 이단이 되겠지요.

핵심은 소유의 모두를 드리느냐 안 드리냐가 아니라

주께서 헌금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을 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생활비 전부를 헌금함에 넣을 수 있었던 이유는 먹이시고 입히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6장의 말씀입니다.

조금 길더라도 같이 읽어볼까요?

25-34절입니다.

여인은 이렇게 보살피고 도우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였기에 그의 생활비를 주께 드릴 수 있었어요.

오늘 본문에서 이 여인이 부각되는 이유는

소위 높은 자들이라고 하는 서기관들에게서 이런 모습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더 연구하고 잘 아는 자들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일에는 더 인색했습니다.

그 말씀을 몸소 실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보기에 하나 보잘것없는 이 여인,

가산을 빼앗겨도 찍소리 하나 못할 이 과부는

오히려 하나님을 전적으로 붙잡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과부가 도리어 진정한 신앙의 본을 보였습니다.

서기관들에게는 중한 심판이 내려질 반면,

이 과부는 예수께 칭찬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본을 따르시겠습니까?

겉으로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다, 신앙인이다 말하지만 정작 말씀을 가슴에 담아두지 않고 삶에서 전혀 따르지 않는

오히려 말씀에 역행하는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세상적으로 보기에는 보잘것없고 하찮아 보이더라도 그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 말씀을 향한 전적인 신뢰를 가지고 살아갈 것인가?

글쎄요,

본문에 등장하는 과부처럼 살면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긴 글렀습니다.

허리 한 번 제대로 펴고 살기 힘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세상이 끝이 아니오 죽음 이후의 영원한 삶이 있기에 세상의 눈으로 보기엔 고된 인생이라도 영원한 생명의 주님 붙잡고 그 분께 칭찬받으며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다면 그것이 더 행복하지 않을까요?

[1] Johannes P. Louw and Eugene Albert Nid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Based on Semantic Domains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1996),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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