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515 야훼가 나의 기업이시니 – 시 16
오늘은 추수감사주일로 지킵니다.
이 전통은 미국의 추수감사절로부터 유래되었습니다.
신앙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도망했던 영국 청교도들이 미국 땅에서의 첫 수확을 감사하며 원주민들과 음식을 나눈 것에서 그 절기는 유래했습니다.
이것이 지금은 미국 문화권에서 최대의 축제 중 하나가 되었고 여러 하부 문화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가령, 올해 우리 나라에서도 흉내 낸 블랙 프라이데이 쇼핑이 그런데요,
11월 마지막 주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보내고 다음 날 대폭 인하된 가격으로 물건을 구입하는 것이 전통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소비 문화 혹은 즐기는 문화만 강조되다 보니까 정작 그 명절 안에 있는 진짜 의미를 놓치고 맙니다.
서울신학대학교 권혁승 교수의 글에 따르면,
이 추수감사절의 성경적 모태는 초막절이라고 합니다.
한 해 추수를 마치고 지키는 것으로 우리 나라의 추석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이 초막절에서 가장 중요한 이벤트는 일주일 동안 초막,즉 텐트를 치고 그 곳에서 생활하는 것입니다.
권혁승 교수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초막에서 지내라고 명하신 이유를 세 가지로 정리합니다.
첫째, 광야 40년 생활을 기억하라
둘째, 불편하고 불완전한 처소에서 하나님을 더욱 바라보라
셋째, 광야에서 가나안을 기대했듯이 초막에 거하면서 새로운 꿈과 희망을 가지라
이렇게 초막절을 지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놓치고 있던 감사를 회복하고 하나님 앞에서 미래에 대한 기대와 비전을 새로이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여러분 삶에 감사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충만하신가요?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신앙인의 감사가 어디로부터 오는지, 왜 우리가 감사할 수 밖에 없는지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그 감사를 토대로 세워가는 구원의 기쁨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먼저 1-4절을 토대로 함께 내용을 보실텐데요,
자, 저를 따라 해 보시겠습니까?
“주님만이 / 나의 피난처요 / 나의 복 이심을 / 감사합니다!”
이 시를 기록한 다윗은 1절의 고백을 입에 달고 살다시피 한 사람이었어요.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사무엘상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요,
어린 양치기 소년이었던 다윗이 형들에게 도시락 주러 갔다가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골리앗을 마주합니다.
어린 소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골리앗과 결투를 벌이게 되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외치면서 물 맷돌 하나로 골리앗을 쓰러뜨리게 됩니다.
그렇게 질 뻔한 전쟁이 다윗 덕에 승리하게 되자 온 백성은 다윗을 칭송하면서 높입니다.
왕이었던 사울은 약속대로 그의 딸 미갈을 부인으로 줍니다.
하지만 거기에서부터 다윗의 고난은 시작되었습니다.
승승장구를 달릴 것 같던 다윗에게 사윗의 시기 질투가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같이 밥 먹는 자리에서 창을 던져 죽이려 하고
자고 있는 처소에 군사들을 풀고
도망쳐 숨어 있는 광야 구석구석을 군사들과 찾아 죽이려고 했습니다.
누군가 나를 계속 죽이려고 쫓아다닌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나를 지켜주소서’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극한 상황 속에서 다윗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사실 다윗 보고 왕이 되라고 기름 붓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시고
골리앗을 쓰러뜨릴 때 외쳤던 것도 하나님 이름이었어요.
다윗 딴에는 내가 왕이 되겠다고 한 것도 아니고
주의 이름을 위해 열심히 싸웠는데 왜 내게 이런 위험과 고난이 닥쳐옵니까? 라고 따져 물었을 수도 있었을 거에요.
네, 다른 시편을 통해서 보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다윗도 낙망하고 절망하고 원망했습니다.
차라리 죽기를 소원하기도 했습니다.
사울을 피하려고 적국에 가서 침을 흘리면서 미친 척까지 했으니 얼마나 싫었을까요…
하지만 다윗은 말합니다.
여호와가 나의 주님이십니다.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습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고백하실 수 있습니까?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 닥쳐도
죽음의 위기가 몰려와도
주의 이름을 위해 헌신했는데 돌아오는 것은 수치와 낙망뿐 일 때에도
주가 나의 주님이십니다 주 만이 나의 복이십니다 라고 고백하실 수 있습니까?
우리가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백성으로 서 있기를 오늘 본문은 이야기합니다.
3절에서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라고 말합니다.
반면 4절에서 우상 숭배하는 자들에게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는 저주의 말을 합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이 혼탁한 세상에서 나는 주의 존귀한 자다, 거룩한 백성이다 라는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면 1-2절의 다윗의 고백이 우리 안의 즐거움으로 동일하게 역사합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는 베드로의 말처럼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그렇습니다 주님! 나는 주께서 택하신 거룩한 백성입니다.
주님만 의지하고 주만이 나의 복이라고 고백하며 살겠습니다 라고 믿음을 보인다면 괴로움을 넘어서는 즐거움이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세상 사람들 보기에는 똑같이 어려워도
그래도 우리의 입술에는 감사가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나의 피난처로 삼으려고 한다면 괴로움이 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신을 멀리서 찾을 것 없습니다.
주님 보다 더 신뢰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다른 신이 될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고백해 보실까요?
“주님만이 나의 피난처요 나의 복이십니다”
이어서 저를 따라 해 보시겠습니까?
“주님이 / 나의 기업이심을 / 감사합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만 유대인들은 기업, 즉 가업과 유산을 이어 받는 것에 굉장히 민감했습니다.
왜냐하면 가나안 땅이 그들이 탈취해서 얻은 땅이었기 때문에 자손들에게 그대로 전수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애굽에서 탈출해서 가나안 땅을 점령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12지파가 땅을 나누는 작업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여호수아가 각 지파별로 땅을 나누고 그 곳에서 삶의 터전을 가꾸게 합니다.
그리고 여러 규례를 통하여 그 지파의 후손들이 그 땅과 기업을 그대로 이어갈 수 있게 합니다.
그러니까 좀 독특한 규례들도 생겨났는데요,
지난 번 말씀드렸던 형사취수제도 그렇습니다.
형이 죽으면 형수를 동생이 아내로 취해서 그 첫 아들로 형의 기업을 잇게 하였다는 것이죠.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업이라는 개념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5절 다윗의 고백을 보십시오.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이 땅의 돈과 재산은 변합니다.
많다가도 하루 아침에 다 없어질 수도 있어요.
주식이 그렇지 않습니까?
상한가를 치던 것이 하루 아침에 휴지조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기업이 그래요.
하지만 하나님이 나의 기업이 되신다면 그 기업은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믿으십니까?
시편 73:26 말씀에,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분깃, 즉 내가 받을 몫의 전부, 다시 말해 내 삶의 필요한 모든 것이 되신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12지파 중 레위 지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지키고 제사를 주관하고 돕는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땅이 없었습니다.
즉 기업이 없었습니다.
아까 분명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기업이 중요하다고 말씀드렸는데 말이죠.
분명 그들에게 땅의 기업은 없었습니다만 주께서 그들의 기업이 되셨습니다.
민수기 18:20 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에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
참 멋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를 위해서 일해. 내가 너의 필요한 것 다 채워줄게.
이렇게 채우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한다면 6절과 같은 고백이 나올 수 있습니다.
같이 읽어보실까요?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주께서 ‘너는 이곳에, 이만큼을 가지고 살아라’ 하고 지정해 주셨는데
욕심이 생겨나면 만족을 못하는 거죠.
사촌 땅이 더 커 보입니다. 배가 아픕니다.
하지만 필요한 것을 채우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아무리 적은 소유를 허락하셨더라도 그 소유에 감사하며 아름답다 찬양할 수 있게 됩니다.
왜요?
하나님 그 분이 나의 기업이 되시는 것을 믿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무리 지구 전체를 기업으로 가졌다고 한들 우주 전체를 창조하신 분하고 비교할 수 있습니까?
나의 삶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것이 결코 바보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의 예배가 됩니다.
“내게 준 가정이 실로 아름답도다”
“내게 준 자녀가 실로 아름답도다”
“내게 준 일터가 실로 아름답도다”
“내게 준 동료들이 실로 아름답도다”
우리 삶의 감사로 주께 영광 돌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고 작은 것에도 아름답다고 고백하며 영광 돌릴 수 있는 것은 나의 힘으로 가능할까요?
그 답은 여전히 하나님께 있습니다.
7절을 보시면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여호와께서 나에게 좋은 생각을 주시고 깨닫게 하신다는 겁니다.
이것은 나의 양심을 통해서도 이뤄집니다.
우리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송축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우리의 생각마저도 붙드시는 분이시기에 그렇습니다.
8절 말씀에서 이것을 뒷받침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아빠의 손을 잡은 어린 아이처럼
나는 더 이상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더 이상 낙담하지 않을 것입니다
함께 고백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이런 고백을 통해서 우리는 전인적 구원의 선포를 보게 됩니다.
9절을 보시면,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이 말씀을 보고 삼박자 축복이 떠올랐습니다.
한 번 암송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3서 1:2)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내 오른쪽에 계시기에
마음이 기쁘고 영이 즐거워하고 육체가 살 것이라고 증거합니다.
이 말씀을 자신의 말씀으로 받으시면 아멘 하십시오.
이렇게 여호와 앞에 살기로 결단하시면 아멘 하십시오.
우리가 결국 바라는 것은 우리의 구원 아니겠습니까?
우리 마음과 영의 기쁨을 허락하시고 육체의 구원을 허락하시는 주께서
우리의 영혼을 버리지 않으시고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입니다.
11절의 고백처럼,
주께서 생명을 길을 보이셔서 충만한 기쁨과 영원한 즐거움이 있는 주님 곁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누구에게 가능한 일입니까?
주께서 나를 지키신다고 고백하고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주께서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복이라고 고백하고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오직 주님만 섬기겠다고 고백하고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나의 분깃이요 나의 기업이라고 고백하고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주님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고백하고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추수감사주일로 지키는 오늘,
혹여 여러분 삶에 위험과 어려움과 고통이 있다 할지라도
도저히 감사를 할 수 없는 상황에 있다 할지라도
여호와가 나의 기업이시니 내가 부족함 없습니다 라고 고백하실 수 있길 부탁합니다.
그런 고백과 감사 위에 주께서 충만한 기쁨과 영원한 즐거움으로 인도하는 생명의 길을 허락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