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915 주의 오심을 준비하라 I - "그 때가 가까울수록" - 눅 21:25-36
112915 주의 오심을 준비하라I ‘그 때가 가까울수록’ 눅21:25-36
우리는 지난 주 이 세상의 혼란과 혼돈이 자신들이 믿는 진리만이 진짜라고 주장하면서
그로 인해 참 진리의 왕이신 예수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또 다른 혼란과 혼돈의 모습을 소개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람들의 논쟁에서 오는 혼란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해와 달에 혼란의 징조가 나타나고
땅과 바다의 혼돈으로 사람들이 두렵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혼란한 중에 곤고하다는 것은
마치 배나 비행기가 위험한 상태에 빠졌을 때 그 안에서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을 생각하시면 쉽게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어떨까요?
극도의 공포와 걱정과, 심지어는 이대로 죽으면 내 남은 식구는 어떡하나 하는 생각까지, 정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겁니다.
그런 상황이 찾아온다는 거에요.
게다가 26절에 보시면 사람들이 다가올 일이 무서워 기절까지 한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늘의 권능들, 즉 온 우주가 흔들리니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사 34:4에서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는 모습을
“해와 달과 별들이 떨어져서 가루가 되고, 하늘은 마치 두루마리처럼 말릴 것이다.” (새번역)
라고 표현합니다.
보통 혼란과 혼돈이 아니죠?
그런데 그 때 인자가 오신답니다.
인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아니, 사랑의 주님이고 평화의 주님이신데 왜 주님 오시는 것이 이렇게 큰 혼란과 두려움을 가져다 줄까요?
자, 잘 보셔야 하는 것이
혼란스러워하고 두려워 떠는 것은 세상의 환경과 사람들입니다.
26절에서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알고 두려워한다고 했습니다.
즉, 마지막 때, 심판의 때가 가까웠다는 것을 안다는 거예요.
옳고 그름을 가리는 때가 가까웠는데 두렵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떳떳하지 못하다는 거지요.
아이도 보세요.
칭찬받을 것이 있는 아이는 부모 또는 선생님의 오는 것이 기다려집니다.
반대로 잘못을 저지른 아이는 두려워 합니다.
지금 본문에서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고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 주님이 처음 아기의 모습으로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오시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심판주로 오셔서 사람들의 잘잘못을 가리실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특히 하나님 나라에 반하던 세상 권세를 심판하실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다니엘 7:24-27에 보면,
“그 열 뿔은 그 나라에서 일어날 열 왕이요 그 후에 또 하나가 일어나리니 그는 먼저 있던 자들과 다르고 또 세 왕을 복종시킬 것이며
그가 장차 지극히 높으신 이를 말로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고치고자 할 것이며 성도들은 그의 손에 붙인 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
그러나 심판이 시작되면 그는 권세를 빼앗기고 완전히 멸망할 것이요
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나라들의 위세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거룩한 백성에게 붙인 바 되리니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라 모든 권세 있는 자들이 다 그를 섬기며 복종하리라”
인자가 오시면 자신들의 모든 권세를 잃고 심판 받을 것을 알기에 두려워 떱니다.
믿는 자들을 박해하고 하나님 뜻에 따르지 않고 권력을 자신들 마음대로 휘두른 책임을 지게 된다는 거지요.[1]
하지만 주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속량이 가까웠느니라”
이 속량이란 구원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이런 일, 즉 해와 달과 온 하늘이 흔들리고 땅과 바다가 요동치고 사람들이 기절할 듯이 두려워 떨 때에
오히려 주의 제자들에게는 구원의 때가 왔고 그들이 당하던 모든 박해가 끝날 것이라는 기쁜 소식의 징조가 되는 것입니다.[2]
같은 현상을 바라보는 두 집단의 극명한 차이가 보이시나요?
예수를 모르고 혹은 알면서도 그 뜻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세상 권세에 붙어서 믿는 자들을 핍박하던 자들은 심판의 때가 가까울수록 두려움에 떨겠지만
갖은 핍박 속에서도 예수의 뜻대로 살고자 애쓴 자들은 그 심판의 때가 곧 자유의 날이요 승리의 날임을 깨닫고 오히려 기뻐하며 기다리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 때가 가까워 온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비유를 들어 설명하신 부분이 있습니다.
나무에 싹이 나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안다 하는 것이죠.
그러면서 이와 같이 너희가, 즉 주의 곁에서 말씀을 듣는 제자들을 일컫습니다.
너희가 나무에 싹이 나면 여름이 가까워 온 줄 아는 것처럼
자연 환경이 요동치고 하늘 권능이 흔들리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워 온 줄 알아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32절과 33절 말씀에서 이 모든 일이 반드시 이뤄질 것이며 결코 헛된 말이 아님을 강조하십니다.
영원할 것 같은 해와 달도 떨어지고 땅과 바다가 요동칠지라도 오히려 이것은 마지막 때를 향한 주의 말씀이 그대로 이뤄지는 것이요,
우리에게는 주의 말씀이 변치 않고 영원하다는 증거가 됩니다.
시 102:26-27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사 40: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벧전 1:24-25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히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자, 주의 말씀, 곧 나무 가지에 싹이 나면 여름이 오듯 마지막 날이 가까워 온다는 그 말씀이
변치 않는 말씀이라면
정말 그 마지막 날이 가까워 오고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 마지막을 준비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항상 기도하고 깨어 있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34절을 보실까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무엇으로부터 입니까?
지금 온 천지가 없어질 판에 경건한 생활을 강조하고 있네요.
세상의 마지막이 가까워 오는 것과 개인의 경건한 삶과 무슨 큰 상관이 있기에 이럴까요?
계 16:15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딤후 5:2-6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벧후 3:10-13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함께 보신 이 말씀들에서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은
주께서 아무런 예고 없이 도둑 같이 오실 텐데
그 때 우리가 주 앞에서 부끄럽지 않을 수 있냐는 겁니다.
해산의 고통이 느닷없이 찾아오는 것처럼 주님 오실텐데 그 때 빛의 자녀로 행하고 있겠느냐 하는 겁니다.
천지가 완전히 뒤집어 지는 그 난리 속에서 우리에게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이 있을 때 약속의 새 하늘과 새 땅을 온전히 바라보고 사모할 수 있다는 겁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가 우리의 마음을 둔하게 만들고
그 날이 순간 임했을 때 우리의 그 아둔한 마음은 우리 스스로의 발목을 잡는 덫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조금 더 직접적으로 말해서,
나 자신을 흐트러트리지 말라는 겁니다.[3]
하지만 삶에 절제나 덕이 없는 방탕한 생활과
성령의 충만함이 아닌 술에 취해 혹은 온갖 중독으로 헤롱거리는 모습과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하고 세상 생활의 염려로 땅이 꺼질 것 같이 한숨을 내쉬는 모습은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만든다는 겁니다.
지금 당장 주님 오셔도 부끄러움 없이 떳떳하게 만날 수 있어야 하는데 마음이 어두워져서 오히려 주님 오심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없어져 버리는 거예요.
그렇게 기대와 소망이 없어진 삶이 주님 앞에서 떳떳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벧전 4: 3에서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라고 하면서
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라고 강력하게 권면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도 그렇지요.
36절입니다.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신학자 윤철원 교수는 이 기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기도는 낙망하는 것과 반대 개념이다. 기도는 끈질기게 견디는 것과 동일선상에 선다.”[4]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마지막 날이 가까울수록
세상 권세자들은 다시 오실 왕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전혀 개의치 않고, 그의 말씀과 법은 전혀 상관하지 않고 자신들의 욕심대로 나라들을 다스리고 그러다가 치고 박고 싸우며 자멸의 길을 걸어갑니다.
그 틈에서 믿는 자들을 향한 핍박과 박해는 점점 심해질 것입니다.
예수 이름 믿고 따르는 것 때문에 죽음보다 더한 핍박이 닥쳐온다면 얼마나 큰 낙망이 찾아오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이겨내는 것이 바로 기도라는 거에요.
그래서 그 기도의 끈을 놓치지 않은 사람은
예수께서 천군천사 이끌고 커다란 나팔소리와 함께 나타나실 때에
모든 만물은 기절할 듯이 떨며 그 왕 앞에 엎드릴 때에 (1초)
(4) 주여, 나는 핍박 속에서도 내 믿음 지켰습니다.
내 마음 변하지 않고 주님만 사랑했습니다.
남들 방탕하고 술 취하고 염려로 마음이 둔해질 때에도 나는 낙망하지 않고 주님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내 앞길 편하게 해주세요. 부와 명예 누리게 해주세요. 내 자식 돈 많이 벌게 해주세요 라고 주문 외우듯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주신 사랑이 고맙고 감사해서
그 복음을 위해 나도 핍박과 박해 두려워하지 않고 십자가 지고 살겠습니다 라고 마음을 새롭게 하며 주께 나가는 것
그것이 바로 깨어 기도하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주님 오심을 기억하며 기다리는 대강절을 시작하였습니다.
성탄절 전까지 네 번의 주일을 이 대강절로 지키게 되는데요,
그 첫 주인 오늘, 주께서 심판주로 오시되 깨어 기도하며 준비하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은 매우 중요한 의미로 다가옵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 다시 오십니다.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천지는 없어져도 다시 오신다는 그 분의 약속은 변치 않습니다.
다만, 다시 오실 주님 잘 맞이하려면 우리 스스로 조심하여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아기 예수를 기다리며 맞이했던 많은 사람들이 주를 만났을 때 무한한 감사와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던 것처럼
다시 오신 주님 만났을 때 두려움과 혼란이 아닌 감사 영광 찬양을 올려드릴 수 있길 간절히 바랍니다.
[1] 윤철원, 누가복음, 서울신학대학교 100주년 기념 주석, 539
[2] 윤철원
[3] 윤철원, 540.
[4] 윤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