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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615 주의 오실 길을 준비하라 II -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 눅 3:1-6

우리는 지난 주 주님 다시 오실 때가 가까워 질수록 어떤 징조가 나타나는지,

그리고 그 가운데서 우리 믿는 자들은 어떤 자세로 주님을 기다려야 하는지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은 주께서 이 세상에 처음 오실 때 주의 오심을 준비했던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본문의 제목처럼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라고 불리기도 했던 자였습니다.

바로 요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한의 이름을 꺼내기 전까지 꽤 많은 직분과 이름들이 등장합니다.

디베료 황제는 누가복음 2:1에 등장하는 가이사 아구스도인데요, 온 백성에게 호적을 명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가 갈릴리를 떠나 베들레헴으로 향하게 되고 그 곳에서 예수가 출생하게 됩니다.

뒤 이어 등장하는 사람은 본디오 빌라도입니다.

유대 총독으로써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준 사람입니다.

다음에 나오는 헤롯은 헤롯 안티파스입니다.

나중에 자신의 불륜 문제를 지적하는 세례 요한을 참수합니다.

후에는 빌라도와 예수의 심판에 대해 서로 떠넘기기도 합니다.

다음에 분봉 왕 빌립과 루사니아의 이름도 등장합니다.

2절에서는 대제사장의 이름도 나옵니다.

안나스와 가야바인데요,

안나스는 로마에 의해 대제사장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사위인 가야바가 대제사장 자리에 앉음으로써 지속해서 영향력을 끼쳤던 사람입니다.

나중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을 포박해서 끌고 갔던 곳이 바로 이 안나스의 집이었습니다.

자, 그렇다면 왜 이렇게 자세하게 통치자의 이름과 시기와 통치 지역을 기록했을까요?

우리가 역사를 볼 때 왜곡됐든 아니든 그래도 비교적 객관적이고 가장 뚜렷하게 남는 기록은 무엇입니까?

바로 통치자의 역사입니다.

다시 말해, 어떤 왕이 어느 시기에 어디에서 다스렸다는 것을 기록한 것은

그들 이름 다음에 등장하는 세례 요한이 그 통치자들과 함께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실제로 조금 전에 말씀 드린 대로 이 통치자들은 요한과 예수의 삶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됩니다.

조금 더 쉽게 이야기해서,

이 통치자들의 이름은 세례 요한이 그 시기에 그 지역에서 활동하던 실존인물이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이 실제로 살았던 인물이라는 것이 증명되었기에

그를 통해 메시아의 사역을 준비시키겠다는 하나님의 약속 역시 사실로 증명됩니다.

이제 요한 이야기를 해 볼까요?

본문은 요한이 사가랴의 아들이라고 소개합니다.

사가랴는 제사장, 즉 레위인 이었습니다.

세례 요한 역시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레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빈들에 있다고 합니다.

제사장이라는 높은 직위를 버리고 광야에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레위인으로써 성전 업무와 제사 업무를 마다한 그에게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는 사실입니다.

2절을 보실까요?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이 대제사장이라는 직위는 어떤 것이었냐 하면,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던 지성소, 즉 하나님의 법궤가 있는 그 곳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습니다.

지성소는 바로 성막의 제일 안쪽에 위치한 성스러운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이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고 더 이상 지성소에서 죄룰 사하는 것이 아닌 예수께서 죄를 사했음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성전이 무너지기 전까지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성소는 감히 갈 수 없는 장소였습니다.

오로지 대제사장만 욤 키푸르, 즉 대속죄일에 모든 백성의 죄에 대한 용서를 하나님 앞에서 구하고자 1년에 딱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은 그렇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대제사장이 버젓이 살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하나님의 말씀이 누구에게 임했다고 합니까?

요한, 그것도 성전이 아닌 빈 들에 거한 자에게 말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였던 사무엘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제사장 엘리가 있었지만 그의 눈은 어두웠습니다.

단순히 육체의 눈만 아니라

올바른 길을 가르치는 것에도 어두워서

자식들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물을 빼돌리는 것도 알지 못한 채 그대로 두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런 제사장처럼 영적으로 암흑의 시대를 걷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엘리가 아닌 소년 사무엘을 찾으셨습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조용히 부르시는 하나님 앞에 사무엘은 엎드렸고 그의 평생 그렇게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살았습니다.

본문을 다시 보시면, 대제사장의 이름이 두 명이나 거론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에게 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높고 화려한 성전으로 임하지 않았습니다.

빈 들, 광야로 임했습니다.

빈 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요한은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합니다.

모양으로는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죄를 사하는 제사를 집전했지만 정작 사람들이 죄 사함을 받고 세례를 받는 곳은 바로 요한의 앞에서 였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은 변한 적이 없습니다.

그 구원을 위한 열정과 역사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구원의 역사를 바라보고 동참하는 사람은 반드시 제사장과 같은 지도자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인류를 창조하신 그 때부터 약속하신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놀라운 사역을 제사장에게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때론 미치광이처럼 광야에서 거친 낙타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야생꿀을 먹고 사는 요한에게 그 사역을 맡기셨습니다.

요즈음 많은 분들이 말하는 것이,

한국 교회가 썩었다고들 합니다.

목사들이 썩었다고들 합니다.

메스컴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목사들의 부정부패, 성범죄, 폭력 등 세상 사람들도 손가락질하는 죄악들을 소개합니다.

그러나 정작 어떤 목사들은 여전히 어떤 신적 권위를 부여 받은 듯이 자기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며 교회를 사적 욕심의 수단으로 사용합니다.

어찌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못하고 자신들의 잇속만 챙기기에 바빴던 사사 시대의 제사장들이나 예수 시대의 제사장들과 매우 유사합니다.

종교개혁이 필요했던 중세 암흑기와 비슷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교회가 변질되고 목사들이 부패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더뎌질까요?

다시 오신다고 하신 주님 안 오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속히 오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지금 말씀하십니다.

교회가, 목사가 썩었다고 뒷담화하느라고 시간 버리지 말고

지금 광야로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주의 오실 길을 준비하는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라고 말이죠.

어떻게 해야 우리는 주의 오실 길을 준비하는

‘광야의 외치는 소리’가 될 수 있을까요?

광야의 외치는 소리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광야에 있어야 합니다.

당연한 소리 가지고 말장난 하냐고요?

네, 당연한 소립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니까 광야에 있어야 되요.

하지만 실상 우리는 광야에 있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 광야를 일부러 멀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광야, 어떤 곳입니까?

이스라엘 광야는 사막하고는 다르게 나름 풀도 있고 나무도 있어요.

차라리 아무것도 없으면 포기라도 할 텐데 풀도 있고 나무도 있으니까 마실 물이나 먹을만한 과일이라도 있을까 하여 눈을 여기저기 돌려봐요.

그런데 없어요.

안락함이나 평안함 따위는 사치입니다.

극심한 온도차와 물 없이는 버틸 수 없는 건조함, 그리고 들짐승의 위험까지..

광야는 고통스러운 곳입니다.

누가 이런 광야 생활을 자처하겠습니까?

그런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40년을 배회했어요.

성군 다윗도 사울을 피해 광야에서 숨어 지내야 했어요.

사도 바울은 3년을 광야에 있었어요.

하지만 그 광야에 있을 때

오히려 이들은 하나님을 만났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어요.

살인자 모세는 광야에서 꺼지지 않는 불로 임하신 하나님을 만났어요.

우울증을 앓던 엘리야는 광야에서 하나님의 전적인 공급하심을 보고 힘을 내 사역합니다.

오늘 본문의 세례 요한도 이 광야, 빈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성경의 수많은 믿음의 위인들에게 광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구원 사역을 준비하는 필수 코스와 같은 곳이었어요.

자신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그 모진 환경 속에서 온전히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을 키워나갔어요.

하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적지 않은 크리스천들에게 이 광야는 기피장소입니다.

광야로 나가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지만

오히려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 받기를 두려워합니다.

왜 삶의 불편을 겪어가면서까지 부담을 느껴야 하느냐고 말합니다.

말씀을 볼수록,

그 음성에 귀 기울일수록

복음 전하라는 메시지가 부담스럽고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이 부담스럽고

골방에서 거룩한 경건에 이르도록 힘쓰라는 말씀이 부담스럽습니다.

그저 만족스러운 내 삶을 내 맘대로 하고 싶지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삶을 어떻게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빈 들에 나가지 않고 화려한 성전에 거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러는 사이 우리에게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점점 희미해져 갑니다.

내가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가는 사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마음에서 멀어져 갑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광야를 피하면 결국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없습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하나님의 계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하다는 말씀이 우리를 향한 말씀이 아니길 바랍니다.

목사인 저도 마찬가지 입니다.

광야에서 고요히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이려 하지 않고

설교의 어떤 기술, 사람들과의 관계, 혹은 개인의 재주나 학력으로 목회를 승부하려 한다면

하나님의 뜻과 반대편에 섰던 제사장들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제가 계속 광야에서 주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받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그는 이사야 예언에 이른 대로 ‘광야에서 외치는 자’가 되어 주의 길을 준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요..

참 멋있기는 틀렸습니다.

황량한 들판에서 외쳐지는 소리는 말 그대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고 맙니다.

효율적인 전도 방법과는 거리가 멉니다.

효과적으로 사람들을 끌어 모을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그 소리를 향하여 미치광이의 소리라고 손가락질 할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런 존재였습니다.

어찌 보면 그저 그렇게 소리로만 존재하도록 보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소리 지르던 그는 목이 잘려 죽습니다.

어느 것 하나 내세울 것 없던 그였지만

예수께서는 그를 가리켜 여자가 나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실 마음의 준비가 되셨습니까?

광야에 들어갈 준비가 되셨습니까?

화려하기는커녕 삭막하기 짝이 없는 그 광야에서

오히려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다시 오실 주님의 길을 곧게 하는 역사가 시작됩니다.

저와 함께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이 마지막 때를 살아가시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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