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315 주의 오심을 준비하라 3 “그가 오시나니” 눅 3:7-18
우리는 지난 주 광야에 나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자고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그 광야에서 요한이 어떤 메시지를 선포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도전과 은혜를 또한 나누고자 합니다.
요한이 요단 강에서 세례를 주고 있을 때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요한이 그들에게 뭐라고 말합니까?
7절 중반부터 다시 볼까요?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대단한 독설입니다.
만약 교회에 새로 나온 사람들한테 ‘이 독사의 자식들아 어디 진노를 피해보겠다고 슬금슬금 기어나와?’ 라고 소리친다면 아무도 여기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은 지금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선택 받은 민족이라는 자부심 하나 가지고 사는 사람들인데
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니요?
하나님의 백성, 선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뱀의 자식이라니요?
멸시가 가득합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독설은 계속됩니다.
‘너희가 속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하지 말라 하나님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기에 구원받았다는 인식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꼬집고 있습니다.
우리가 육적으로 따진다면 아브라함과 관계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 구원 받았잖습니까?
하나님의 구원은 혈육에 국한되지 않음을 요한은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부질없는 선민의식을 향해
그들에게 이미 도끼가 놓여있다고 무섭게 지적합니다.
그러니까 겉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네 하나님의 선택 받은 백성이네 하면서 번지르르 해도
속에 하나님의 백성다운 열매,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없으니
그저 찍혀 불에 던져질 나무처럼 그들에게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절망적인 메시지에, 그러나 사람들은 반응합니다.
10절을 같이 읽어볼까요?
이어지는 11-14절에는 아주 구체적인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여러 대상을 향해 주는 이 메시지들에서 공통적으로 과욕을 버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의 속내에는 약자들을 배려하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두 개가 있는 자는 하나를 없는 자에게 주라고 말씀합니다.
세리들이 정해진 것 외에 거두어서 고통 받는 사람들은 누구겠습니까?
군인들이 자기 급료에 만족하지 못해서 강탈하거나 거짓 고발할 때 가장 고통 받는 사람들은 누구겠습니까?
구약에서부터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약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은 매우 크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을 지금 세례 요한은 회개의 메시지에도 그대로 적용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고 보면 우리에게 오늘 본문은 회개, 그리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무엇인가 곰곰히 생각해 보게 합니다.
단순히 내가 잘못했습니다 라고 중얼거리는 것이 회개인가?
물론 그도 안 하는 것보다야 낫겠습니다만
삶에서 무엇을 회개해야 하고 어떤 행동이 나타나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세례 요한은 세리와 군인들에게 당장 그 일을 그만두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공의를 실현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공의라고 하니까 너무 거창한가요?
조금 전에 말씀 드린 사회적 약자를 위한 작은 배려가 바로 그 정의와 공의의 시작점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내 삶에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았음을 돌아보면서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나의 가진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이 바로 회개요 그 열매를 맺는 행동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부흥전도자 D.L. 무디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성경이 읽어지지 않으면 밖으로 나가서 수레를 밀어주고 와서 다시 읽어라’
세례 요한의 거침없는 메시지를 들은 사람들이 반응합니다.
속으로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저 사람이 우리가 기다리던 그리스도 아닐까?’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15절에는 작은 단서가 숨어 있습니다.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들 마음이 아주 죽을 것 같았다는 것을 대변합니다.
약속대로 메시아가 오셔야 자신들이 자유를 얻고 하나님의 백성처럼 살 수 있을 텐데… 하는 큰 기대와 소망이 그들 마음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때 한 광인 같은 자가 나타나 외치는 메시지가 그 마음에 확 와 닿는 거에요.
여태까지 들을 수 없었던 강력한 회개의 선포가 그들로 하여금 요한을 메시아로 생각하게 했습니다.
어쩌면 메시아 이길 바랐는지도 모릅니다.
저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충만한 자라면 우리를 이 로마 식민지에서 구원하고 자유를 줄 수 있지 않을까 하고요.
그런데 요한이 말합니다.
나 아니야.
그리고 비로소 자신의 역할을 합니다.
메시아를 소개하기 시작합니다.
요한이 소개하는 이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선 요한보다 능력이 많다고 합니다.
얼마나 많은가 하니 요한이 그의 신발끈 조차도 못 풀 정도라고 합니다.
신발끈을 풀어주고 그 신발을 챙겨주는 것은 가장 낮은 신분의 종이 하던 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마저도 못할 정도라고 합니다.
물론 요한이 겸손하게 자신을 낮춘 말이긴 합니다만
그로 인해 메시아가 얼마나 위대한 분인지 상대적으로 잘 나타납니다.
또한 그 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라 말합니다.
이것에 대한 자세한 상황은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같이 찾아보실까요?
먼저 행 1:5 입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오늘 본문의 세례 요한의 말과 매우 유사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가 사도행전도 기록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누가는 이 사도행전에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뒤 사흘만에 살아나셨고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거하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고 증인이 되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이 말했던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시는 장면이 이어지는 사도행전 2장에 등장합니다.
2:1-4을 보시죠.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세례 요한 스스로의 말처럼 그는 물로 세례를 주었고 메시아 예수께서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셨습니다.
요한의 물 세례가 죄에서 돌이킨다는 외적인 표시라면,
예수의 성령 세례는 죄에서 돌이켜 그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다시 말해, 요한의 물 세례는 공동체 안에서 죄를 회개하고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외적인 표식이 되며
성령 세례, 즉 성령충만은 그 제자의 삶을 실제로 살아가는 동기이자 힘이 됩니다.
더불어 세례 요한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17절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바로 심판주의 모습입니다.
9절에서 이미 회개의 열매가 없는 나무는 찍혀서 불에 던져질 것이라고 무시무시한 경고를 하였는데
그것을 이루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시라는 겁니다.
키 질을 하듯 하여 알곡과 쭉정이를 골라내고
알곡은 곳간에, 쭉정이는 불, 그것도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신다고 합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셔서 구원의 기쁨을 누리고
제자로써의 참된 삶을 살아가게 하시지만
그렇게 살지 못한 자들은 마지막 날에 가려내어 불에 던지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 이시라는 겁니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말씀 뒤 18절을 보시면,
요한이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했다고 말합니다.
좋은 소식을 전했다고 하는 것은
εὐηγγελίζετο 즉,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본문 전체를 놓고 본다면,
비록 세례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오는 사람들한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호통치고
이미 너희 앞에 놓인 진노를 피하려고 애쓰느냐며 꾸짖고
그리스도께서도 쭉정이를 불에 태우실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이는 결국 그들로 하여금 마음을 돌이켜 복음을 듣게 하기 위해서 이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완악한 데서 돌이켜서
진짜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실 때
그 말씀을 온전히 받을 수 있도록 준비시키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천년 전에 오셨고 이제 곧 다시 오실 주님을 우리가 기다리면서
또 그 오실 길을 준비하면서
우리의 가장 큰 사명은 예수의 증인이 되어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동의하십니까?
그러나 그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을 먼저 돌아보고 욕심이 아닌 성령에 충만한, 그리고 그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내 노력으로 복음을 전하고자 하면 부담스럽기 그지 없어 효율과 효과를 따지게 되지만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내 안에 살아계신 예수를 전하게 하신다면 우리의 삶 자체는 아름다운 복음 전도의 현장이 됩니다.
그렇다면 그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은 어떤 삶입니까?
갈 5:22-25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그리고 이렇게 성령으로 살고 행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나는 자들이 됩니다.
고후 2:15-16 절은 말합니다.
“우리는, 구원을 얻는 사람들 가운데서나, 멸망을 당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나, 하나님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그러나 멸망을 당하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죽음의 냄새가 되고, 구원을 얻는 사람들에게는 생명에 이르게 하는 생명의 향기가 됩니다. 이런 일을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일을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여러분이 되시길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