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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715 다시 예수를 찾아서 – 눅2:41-52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간단하게 말하자면 아동 실종 사건입니다.

부모 입장에서 바로 옆에 있을 것 같던 아이가 없어지는 것만큼 당황스러운 순간도 없을 겁니다.

다행히도 아직 제 아이를 그랬던 적은 없습니다만,

저 어렸을 때 그런 기억이 있습니다.

어머니 손을 잡고 시장을 갔는데

아마 시계방 앞에 캐릭터 시계를 눈 여겨 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기억으론 그래요.

신기하게 들여다 보다가 눈을 들었는데 옆에 있어야 할 어머니가 안 계시는 거에요.

그래도 일곱 여덟 살쯤 이었고

집 근처 시장이라 울고 불고 안하고 집을 혼자 찾아갔습니다.

기특하죠?

그렇게 집 앞에 다다랐을 때 제 눈에 보이는 것은

차를 타고 저를 찾으러 떠나려는 부모님의 근심 어린 얼굴이었습니다.

부모가 된 지금 그 때 생각을 하자니

같이 시장에 데려갔던 어머니가 참 많이 힘드셨을 것 같더라고요.

자책도 많이 하셨을 것 같고

아이한테 무슨 일 생기지는 않았을까 험한 생각으로 힘드셨겠지요.

이제 와서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어찌 보면 오늘 본문 이야기도 참 비슷해요.

북적거리는 거리에서 아이가 따라오겠거니 하고 하룻길이나 갔는데 아이가 없는 것을 확인했을 때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당황스럽고 무너져 내렸을까요?

예수와 그의 부모는 다른 유대인들이 그렇듯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애굽에서 백성을 이끌어내신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온 나라에서 사람들이 모였으니 얼마나 혼잡했을까요?

열 두 살이었던 아이 예수도 그 혼잡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래도 부모는 아이가 열 두 살이나 되었고 40절 말씀처럼 지혜롭고 강한 아이이니 별 걱정 안하고 길을 향했을 겁니다.

그리고 44절 말씀처럼 동행이 꽤 많았기 때문에 서로 잘 챙기면서 집을 향해 함께 가고 있겠거니 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믿음과는 상관없이 아이는 예루살렘에 남았습니다.

아이의 부모가 얼마나 놀랐을지 상상이 가시나요?

놀란 심정으로 길을 되짚어 갑니다.

삼일 뒤에나 만났다고 하니

하룻길을 삼일이나 걸려서 구석구석 찾아 헤매면서

그 되짚어 가는 길이 얼마나 고통 자체였는지 감히 생각해 봅니다.

부모는 그렇게 속이 새까맣게 타 들어가면서 아이를 찾았는데 이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성전에 앉아 선생들하고 담론을 하고 있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 지혜에 놀라니까 부모도 놀라우면서도 아이를 다그칩니다.

48절을 보실까요?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리고 그의 부모도 그를 보고 놀랐다. 이때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이게 무슨 짓이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찾느라고 무척이나 애썼단다' 하자”

그런데 아이의 대답이 가관입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50절에 보면 그 부모가 전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사흘이나 걸려서 울고 불고 하면서 기껏 아이를 찾았는데 ‘내가 여기 있는 것도 몰랐어요?’ 라고 되묻고 있으니 이 녀석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었겠지요.

이런 해프닝이 있은 다음 아이 예수는 그 부모와 함께 다시 나사렛으로 돌아갔고 그 곳에서 무럭무럭 자라갑니다.

성경에서 여러 이야기를 다루지만 아이를 잃고 부모가 당황한 이야기는 오늘 본문 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예수의 부모가 그렇게 예수를 잃어버리고 사흘 길을 찾아 헤매는 모습은 조금은 무책임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마냥 그렇게 요셉과 마리아를 비난할 수 없는 것은 우리의 모습과 매우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해마다 절기를 지키기 위해 성전으로 모이듯

시간이 되면, 때가 되면 교회로 모여요.

예수와 동행하는 것 같지만

사람들 틈에 북적북적하는 사이에

어느새 예수는 내 옆에 계시지 않아요.

예배도 하고, 이웃도 돕고, 사람들과 만나 교제도 하고, 즐겁고 보람된 시간을 보내지만,

어느새 우리의 예배와 교제와 섬김에서 예수가 사라져 있어요.

말로는 내가 예수 믿는 자라 이야기하고

예수의 부모처럼 내가 그를 가장 잘 안다고 이야기하지만

어느새 예수 없이 하룻길을 가버렸어요.

잠시 잊고 있어도 다른 사람들하고 같이 있겠거니

언제든지 찾으면 있겠거니 하고

그저 내 갈 길을 가요.

교회에 왔던 내 목적 이뤘으니 이제 부지런히 집으로 돌아가요.

예수가 내 옆에 없는데도요.

예수는 그저 교회에 내버려두고 나만 돌아가요.

그렇게 내 뜻대로 내 마음에 좋은 대로 한참을 간 뒤에

잊을만할 때

힘들어 질만할 때

예수가 생각나는 거예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묻지만 아는 이가 없어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내 신앙의 도움을 청하지만 그들에게서 예수를 얻을 수 없어요.

결국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수고를 합니다.

근심하며 아파하며 울며 불며 그렇게 되돌아갑니다.

하지만 이 것이 쉽지 않습니다.

여기에 예수가 있나 저기에 예수가 있나 찾느라 하룻길을 사흘 만에 가는 세 배 이상의 노력이 듭니다.

어쨌든 예수를 다시 찾게 되지만 그 길에 고통이 따릅니다.

예수님에게서 잠시 멀어지는 것,

생각보다 쉽습니다.

그러나 다시 돌아오려고 할 때 우리의 눈과 마음을 가리고 있는 욕심과 죄악을 떨쳐내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물론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모든 죄를 사하셨지만,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도우시며 중보하고 계시지만,

우리의 연약함과 사탄 마귀의 끊임없는 공격은 예수께 가는 우리 길을 멀어지게 합니다.

혹여 지금 예수의 손을 놓고 계셨다면,

이 사람 저 사람 찾아가 물으며 헤매지 마시고

곧장 아버지의 집으로 가십시오.

예수가 계시는 말씀 속으로 들어가십시오.

우리의 심령의 문을 두드리시는 성령님을 기다리며 무릎을 꿇으십시오.

더불어 예수의 모습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또한 돌아보고자 합니다.

예수의 부모가 예수를 찾았을 때 예수께서는 반문하셨어요.

내가 여기 있어야 할 것을 알지 못했냐고요.

하지만 반항은 아니었어요.

자신을 놓고 갔던 부모에 대한 미움도 아니었어요.

바로 부모를 따라 집에 갔고 그 곳에 순종하여 받들었다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저는 이 부분을 보면서 참 어려운 것을 쉽게 써 놨다 생각했습니다.

오늘 본문 중에 보시면 예수께서 선생들과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오잖습니까?

예수는 당시 열두 살이었고

선생들이라고 하면 당시 랍비, 즉 유대의 모든 경전에 대해 잘 알고 있고 백성들에게 그 지혜를 가르치고 존경 받던 어른들이었어요.

열두 살 아이가 그런 어른들과 묻기도 하고 대답을 하는데 그 선생들이 아이의 대답에 대해 놀랐다고 말합니다.

아이가 나흘, 즉 하룻길을 갔다가 사흘길을 돌아온 그 시간을 부모 없이 있던 것도 대단한데 선생들이 놀랄 정도로 지혜를 보이고 있어요.

만약 요즘처럼

영재라면 환장하는 이 시대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예수는 당장 스타킹에 나갔을 거예요.

수퍼스타 K에 내보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비록 아이의 모습이었지만 예수께서는 이미 여러 사람들에게 인정받았기에 마음만 먹었다면 당장 대중 앞에 나섰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어떻게 하셨다고요?

그 시골 동네 나사렛으로 다시 가시고 그곳에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부모에게 순종하며 섬겼어요.

예수께서는 자신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음을 아셨어요.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 아셨어요.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섬겨야 할 사람들이 누구인지 아셨어요.

하지만 우리는 어떻습니까?

조금만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조금만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조금만 내 하는 일에 자신감이 생기면

덤벼들어요.

하나님의 때는 상관하지 않고 덤벼들어요.

하나님의 때를 못 기다리고 정신 없이 달리다 보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 안에 예수를 모시고 그 뜻대로 살아가지 못하다는 말이 됩니다.

그럼 이것도 앞에서 이야기한 것과 결국 같은 이야기가 되요.

예수 없는 삶.

겉으로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대단한 일을 하는 것 같지만

정작 그 안에는 예수가 없는 삶을 사는 거예요.

그 뜻과는 상관없는 삶을 사는 거예요.

우리 예수를 본받으십시오.

강하고 지혜가 충만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늘 있던 사람이었어요.

누구나 놀라워할 정도로 엄청난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때가 이르기 까지 자신의 자리를 떠나지 않았어요.

아버지의 전에 자신이 있어야 할 것을 피력하셨지만 이마저도 육신의 부모에게 순종하며 본인의 자리로 향하셨어요.

이런 놀라운 겸손과 순종이 우리에게 있길 간절히 바랍니다.

겸손의 왕이신 예수를 우리 마음에 중심에 두고 그 분이 보이셨던 섬김의 본을 우리가 또한 보이길 원합니다.

그럴 때 예수께서 지혜와 키가 자라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셨던 것처럼

우리의 신앙도 그렇게 사랑스럽게 아름답게 자라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2015년 마지막 주일 예배를 이렇게 드리고 있습니다.

성서일과에 따라 오늘 본문을 접하고 저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연 마지막 주일 예배에 과연 이 본문으로 어떻게 은혜를 나눌 것인가?’

지나가는 한 해를 돌아보고 다가올 한 해를 계획하는 이 시점에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예수를 놓치고 있지 않았는가 묻고 있습니다.

혹시 지나온 삶이 예수를 놓치고 다시 그를 찾고자 방황하는 삶이었다면,

다가오는 새해에 예수를 꼭 붙잡고 그와 동행하는 삶을 사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예수와 상관없이 내 뜻대로 살아온 한 해였다면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겸손과 섬김의 신앙으로 새로운 한 해를 살아가길 간절히 원합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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