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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016 한마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는 교회II –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라 2 - 빌1:27-28

우리는 지난 주 동일한 본문을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이 무엇인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단순히 우리를 천국에 들여보네 주고 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예수의 삶처럼, 그 분의 이야기처럼 살아가게 하는 것이라고 또한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그 두 번째 시간으로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한 삶,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나의 이야기처럼 사는 삶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살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는 삶을 살 것인지 또한 나누어 보겠습니다.

저를 따라 해 보실까요?

복음에 합당한 삶은 당당한 삶이다.

바울은 뒤에 빌립보서 3장 20절에서 우리를 하늘의 시민권자로 일컫습니다.

같이 읽어보실까요?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그 안에 행하는 자는 더 이상 세상의 묶여 있는 자가 아니오,

하늘의 법을 따르는 하늘 시민권자가 된다는 겁니다.

그것도 그냥 시민이 아니에요.

그 왕국의 양자로 들어가는 겁니다.

롬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피 흘리신 대가 입니다.

십자가에서 그의 살이 찢기고 피가 뿌려지는 그 순간,

우리 인간의 모든 죄의 값은 해결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마지막에 하신 말씀, ‘다 이루었다’ 라는 말은 ‘테텔레스타이’ 즉 ‘다 갚았다’ 라는 말입니다.

당시 시장에서 쓰던 말 그대로예요.

다 갚.았.다.

그 피 흘린 값으로 새롭게 된 우리의 삶이 움추러들 필요 있습니까?

이미 죄의 값을 갚아주셨는데 그 죄의 값이 무서워 계속 긴장하며 살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즉,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란

이는 곧 더 이상 죄의 값을 생각할 필요 없는 하늘 시민권을 가진 자의 당당한 모습입니다.

하늘의 시민권 얘기를 하니까 너무 먼 나라, 뜬 구름 잡는 얘기 같으시죠?

실례지만 제 이야기를 잠깐 할까 합니다.

이 시민권이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그 전에는 미처 몰랐어요.

미국에 있을 때 보니까요,

수 많은 사람들이 미국 시민권 따자고 몇 년씩 기다리고 심지어 몇 천만원씩 쏟아 부어요.

사기도 많이 당합니다.

그래도 길이 열리지 않아서 불법체류자로 살아가요.

시민권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온갖 불편을 다 감수하면서도 시민권을 동경합니다.

저도 합법적인 신분으로 있었지만 시민권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불편함이 한 두 가지가 아니더라고요.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불편함은 내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혹시나 불법을 저지르는 것은 아닌지 매사에 과민 반응하게 되고 움추러들게 되더라는 겁니다.

자연스레 저도 시민권이 있으면 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아직도 세계 초 강대국이라고 하는 미국의 시민이라는 그 자부심과 당당함이 엄청나 보였습니다.

지금이야 귀국해서 내 나라 내 땅을 밟고 살다 보니 딱히 부러울 것도 없습니다만

그 곳에서 살 당시에는 그것이 참 대단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복음 안에 거하는 자는 하늘의 시민권을 소유한 자라고 말이죠.

미국 시민권이 대수입니까?

세상의 어떤 근심과 걱정과 핍박과 박해라도 감히 빼앗아 갈 수 없는 하늘의 시민권이 우리의 것 입니다!

여러분 담대하십시오.

돈 때문에 움추러들지 마시고

권력 앞에서 움추러들지 마시고

나보다 잘나 보이는 사람 앞에서 움추러들지 마세요!

여러분은 복음을 가졌습니다.

하늘의 시민권을 가졌습니다.

다시 한 번 따라해 보시지요.

복음에 합당한 삶은 당당한 삶이다.

두 번째로 따라해 보실까요?

복음에 합당한 삶은 기뻐하는 삶이다.

이 글을 쓴 바울을 생각해 보실까요?

지금 감옥에 갇혀 있는 상황입니다.

육체적인 불편은 물론이거니와

아주 수치스럽고 불명예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1]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그가 감옥에서 쓴 이 빌립보서의 별칭이 “기쁨의 편지”라는 것을 말입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열심히 복음을 전한다고 뛰어다닌 그에게 찾아온 것은 감옥에 갇힘과 온갖 불편함, 그리고 수치였어요.

그런 그가 지금 기쁨의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 것이 가능했을까요?

바울은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사는 자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복음의 기쁨으로 가득한 그의 마음이 빌립보서, 이 편지에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1:4절을 보시면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18절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2: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4:10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그런데요 여러분

감옥 중에서도 기뻐하는 바울의 이 삶이

실제로 한 가정을 주께 인도하는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사도행전 16장에 보시면 빌립보에서 바울과 실라가 전도여행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거기에서 귀신들린 여종에게서 귀신을 내쫓아주었다가 영업방해죄로 투옥됩니다.

하지만 성경은 바울과 실라가 밤 중에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했다고 말합니다.

그 때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다 열리고 손 발을 묶고 있던 사슬이 다 풀어집니다.

말 그대로 기적이 일어난 겁니다.

죄수들을 다 놓친 것으로 여긴 간수가 책임이 두려워 자결하려 할 때

바울과 실라가 그의 손을 막습니다.

두려워 떨며 구원을 간구하는 그에게 바울이 말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행 16:24).

바울과 신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할 때 절망 중인 상황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절망 중에서도 그들이 감사와 기쁨으로 하나님을 예배했다는 것도 분명합니다.

이 이야기는 기뻐하는 삶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한 아주 좋은 예 입니다.

우리 때로 기쁨보다는 짜증과 좌절, 낙망과 두려움으로 하루하루 지낼 때가 있지 않습니까?

예수의 복음이 기쁜 소식인 것도 알겠고

나도 그 기쁜 소식을 따라 기뻐하며 살아야 할 것도 알겠는데

그게 말처럼 잘 안되요.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합니다.

기뻐하라.. 항상 기뻐하라…

데살로니가전서 5:16-18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 뜻이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즉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일진대,

그것이 바로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기뻐하라 다음에 기도하라 가 나온다는 사실이에요.

또 제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만,

지난 한 주간 저는 혼자 적잖이 마음의 전쟁을 겪었습니다.

별 것도 아닌 일들이었는데

아이와 투닥 거리면서 아이처럼 맘 상하고 아이와 아내한테 본의 아니게 가시를 뻗곤 했습니다.

아이가 지지난 주 심하게 감기몸살을 앓고 난 뒤라 어리광이 부쩍 심해지고 고집도 세졌습니다.

목요일도 아이가 어린이집 안 가고집에서 놀고 싶다고 버티는 것을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지르고 야단을 하고 말았습니다.

훈육이 아니라 제 감정의 폭발이었어요.

수요일 저녁도 울고 불고 한 것이 있어서 결국 저도 터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내한테도 좋은 말이 나가지 않더라고요.

그렇게 아침을 보내고 나니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설교 준비도 될 턱이 있나요.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된다고 선포해야 하는데 씩씩 거리는 마음으로 도저히 그럴 수 없는 거예요.

금요일은 급기야 도대체 나에게 왜 기쁨이 없을까 하는 좌절감이 드는 겁니다.

분명 예수의 복음이 내 안에 있는데… 성령께서 나와 함께 하실텐데… 왜 내 마음이 이렇게 짜증만 가득할까..

그렇게 무거운 마음으로 집에 와서 무심코 인터넷을 보는데 한 영상 속에 대화가 저의 마음을 울렸습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으로 우리를 만나기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찾길 바라고 계신다.”

아 그렇구나.. 나의 마음에 기쁨이 없는 것은 하나님을 찾지 않았기 때문이구나.

그 기쁨을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구나.

바로 무릎을 꿇었습니다.

성령을 구했습니다.

회개의 눈물이 났습니다.

비로소 마음에 평화가 찾아오고 감사가 찾아왔습니다.

저는 이것이 복음에 합당한 삶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와 같이 해 보시죠.

복음에 합당한 삶은 무릎으로 간구하는 삶이다.

제가 여기에서 아무리 당당하게 사십시오, 기쁨으로 사십시오, 이것이 복음에 합당한 삶입니다 라고 외쳐도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 잘 압니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은 그 당당하고 기쁨으로 사는 삶이 기도하면 이뤄지기 시작합니다.

무릎 꿇고 기도하면 변하기 시작합니다.

내 마음에 복음의 능력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거에요.

내 삶에 복음의 담대함이 자리잡기 시작하는 거에요.

내 영혼이 이 땅의 부와 명예가 아니라 하늘을 소망하며 살게 되는 거예요.

언제요?

무릎 꿇고 기도할 때!

무릎 꿇고 눈물 흘리며 구할 때 하나님은 주세요.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마 7:7)

이 말씀이 세상의 것 구하라고 주신 말씀이겠습니까?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길 구하세요.

복음으로 당당한 삶을 살 수 있길 구하세요.

복음으로 기쁨 가득한 삶을 살 수 있길 구하세요.

성령 충만하도록 구하세요.

성령께서 우리의 기도에 함께 하실 것입니다.

연약한 우리가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 8:2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께서 우리의 죄 빚을 다 갚아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 없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이 것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누리며 사는 삶은 곧 세상 속에서 당당한 삶이요 기뻐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이런 삶을 위해 우리는 반드시 겸손하게 무릎 꿇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 삶이 먼저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겠지만 결국 이 삶을 통해 우리 주변이 변화되고 우리 사회가 변화되고 열방이 변화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구원받은 자 답게 하는 우리의 모습을 통해 열방이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담대하십시오.

기뻐하십시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1] 윤철원, 신약성서의 그레꼬-로마적 읽기, 한들, 2000, 8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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