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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3116 한마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는 교회V – 대적이 주는 두려움을 물리치고 - 빌1:27-28


우리는 지난 주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이 무엇인가 살펴보았습니다.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기 위해 함께 싸우는 것이라고 했는데요,

바울은 이어지는 말씀에서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한다고 빌립보 교회를 격려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분투하는 과정에서 우리를 대적하는 자들이 누구이고 또 어떤 두려움이 올 수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분투하는 우리에게 대적하는 자들이 주는 두려움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 것인가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럼 먼저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질문은 크게 두 가지 입니다.

1. 누가 우리의 대적인가

2. 무엇이 우리를 두렵게 하는가

지난 4주간 함께 나눈 말씀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하늘의 시민권자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라고 우리의 정체성을 밝혔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맞서는, 우리의 대적은 누구이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복음을 탐탁지 않게 여기거나 우리가 그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을 싫어하는 자 아닐까요?

물론 복음을 싫어하고 그 복음대로 살아가는 것을 싫어하는 주범은 사단입니다.

저는 이 시간 이 사단과 더불어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는 대적자들을 세 분류로 나누고 이에 따른 두려움, 그리고 이를 극복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첫째, 외부의 대적자들이 주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직접적으로 예수 이름 믿는 것을 핍박하는 자들이 우리의 대적자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아래 30절에서 바울이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싸움은 지난 번에 말씀 드린 사도행전의 그 사건을 일컫습니다.

귀신 들린 여종을 고쳐주었다가 감옥에 갇혔던 그 사건 말입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간수와 그 가족 전체가 구원 받았고 빌립보에는 교회가 세워졌지만

분명 바울은 복음과 이를 전하는 일에 대한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매에 맞고 옥에 갇혔습니다.

두려운 일입니다.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볼 때 지금 빌립보 교회가 복음을 반대하고 탄압하는 외부 특정 무리와 부딪히고 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바울을 감옥에 가두었던 자들처럼 복음을 반기지 않는 권력자들이 빌립보 교회를 핍박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사실 본문에서 이 외부 대적자들의 정체를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만

당시 종교적 상황과 바울의 다른 편지를 참고한다면

이단들이 빌립보 교회에 대적자였다는 것 역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그릇된 가르침으로 성도들의 믿음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2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

예수의 가르침에서도 그렇고 바울의 편지에서도 마지막 때가 가까웠으니 우리의 믿음과 행실을 바로 해야 한다는 메시지는 자주 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을 가지고 극단적이고 광란적인 종말론으로 몰아가는 자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물론 지금도 그렇고요.

쉽게 예를 들면, 작년 겨울 홍 모 전도사 라는 사람이 북한과 전쟁이 난다며 회개하라고 외치고 다녔던 일이 있었습니다.

물론 소동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만, 그녀의 말을 듣고 실제 해외로 도피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빌립보교회도 그랬겠지요.

아직 기독교가 공인된 것이 아니니 자유로운 신앙보다는 핍박이 있었을 것이고

로마의 문란함이나 정치의 부패한 모습을 보았을 때

당장 세상이 끝날 것 같은 극단적인 종말론은 일부 성도들의 마음을 흔들었을 것입니다.

굉장히 두려웠을 거에요.

하지만 바울은 이어지는 데살로니가후서 2:3-4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이 시대에 활동하는 이단들을 보시지요.

굉장히 극단적인 종말론을 주장합니다.

또 우리가 믿고 전하는 복음과 비슷한 것처럼 보이지만 끝으로 가면 이단 교주의 신성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당당합니다.

자신들을 이단이라고 하는 교회를 고소합니다.

거짓 성도들을 보내어 교회를 자신들의 것으로 집어 삼킵니다.

이런 이단들,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은 거짓으로 무장하여 교회와 성도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두렵게 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굳건하게 서서 말로나 우리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키라” (살후 2:15)

우리가 말세가 가까울수록 시대의 징조에 민감해져야 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과 귀가 민감해질수록 오히려 우리의 마음은 담대해져야 합니다.

어떻게요?

바로 이 말씀과 교회 전통을 통해서 말이죠.

아무리 저들의 말이 맞는 것 같더라도 말씀에 비춰보고 지금까지 이어져온 교회의 전통에 비추어 납득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과 복음을 흔들려는 공격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대적해야 합니다.

주께서 지혜와 담대함으로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외부의 대적자들과 반대로 내부의 대적자들도 있습니다.

지금 영화 내부자들이 꽤 인기리에 상영되고 있습니다.

청소년 불가의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던져주는 메시지는 꽤 진중합니다.

이 영화의 묘미는 제목처럼 내부자에 의한 통쾌한 반전이 있다는 것입니다.

영화가 소위 악당의 계획대로 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빠질 무렵 내부자를 통한 반전이 속을 시원하게 합니다.

아직 안 보신 분들을 위해서 영화 얘기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자, 영화에서는 내부자의 이런 반전이 기가 막힌 장치가 되었지만 현실에서는 글쎄요,

특히 교회 안에서 내부자들의 반전은 그리 반갑지 않습니다.

오해 없이 들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주께서 원하시는 교회를 위한 끊임없는 성찰과 반성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로마 카톨릭의 내부자였던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것처럼 말이죠.

그러나 제가 말한 반갑지 않는 내부자들은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려고 교회의 순리를 뒤집어 놓는 사람들입니다.

내 육신의 자랑과 내 소견에 옳은대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교회에서 기득권을 차지하려는 이런 내부자들이 다름 아닌 복음의 대적자들입니다.

오늘 본문 뒤에 3장에서 바울이 할례파에 대해 나무라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혈통에 상관없이 구원받지만

일부 유대인들은 아직도 구원 받기 위해 할례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교회를 분열시키고 있었습니다.

사실, 외부에서 탄압과 핍박이 있다해도 마음을 모으고 힘을 합쳐서 시련을 이겨내기로 결단하면 잘 이겨낼 수 있습니다.

힘든 시기를 잘 이겨낸 가족 구성원들이 더 화목해지고

경제난을 잘 이겨낸 회사 조직원들이 더 팀웍이 좋아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내부에서 발생하는 분열과 다툼은 더 충격이 큽니다.

교회가 참 그렇습니다.

말로는 사랑의 공동체라고 하지만 때로는 유리처럼, 달걀처럼 연약한 것이 교회라는 공동체입니다.

세상에서 상처받고 깨진 심령으로 모인 사람들이 오히려 더 큰 상처를 주거나 받고 떠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분열이 일어나고 다툼이 일어나고 다른 지체들에게 상처를 줍니까?

예수와 그의 복음 외에도 여전히 자신들의 주장과 생각과 욕심이 살아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주시기 위해, 잃은 양 하나를 구원하기 위해 얼마나 아프고 억울하고 힘드셨는지 안다면

감히 다른 성도들 앞에서 너보다 내가 낫다

너도 나처럼 되기 위해 할례를 행해야 한다는 말 따위는 할 수 없습니다.

할례 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자신들이 할례파, 정통 유대인임을 강조하는 자들 때문에 비유대인이었던 성도들이 얼마나 두려움을 가졌겠습니까?

바울은 당당하게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빌 3:3)

이겁니다.

내부의 대적자들과 그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성령으로 봉사하고 예수만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 (골 2:6-10)

마지막으로, 여기 우리의 가장 큰 대적자가 남아 있습니다.

이 대적자가 주는 두려움은 권력자들의 핍박이나 교회 내부의 다툼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적입니다.

이 대적자는 바로 ‘나’입니다.

무엇인가 거대한 적을 기대하셨다면 실망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엇인가 거대한 영적 전투에 대한 것을 기대하셨다면 역시 실망하셨을 겁니다.

하지만 가장 이기기 어려운 적이 나 자신인 것 또한 분명하지 않습니까?

우리 조금 솔직해져 볼까요?

우리 신앙 생활하는데 핍박자가 있습니까?

아니면 이단들이 우리를 공격하나요?

그도 아니면 사람들이 많아서 이런 저런 의견들이 넘쳐나서 다툼이나 분쟁이 있습니까?

자랑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우리 교회, 이 공동체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 가장 큰 적은 우리 스스로 입니다.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으니까 성경대로 말씀대로 살 필요를 못 느낍니다.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기에 기도의 무릎이 꿇어지지 않습니다.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기 때문에..

나에게 가장 큰 적은 나의 게으름입니다.

나의 비교의식에서 비롯된 낮아진 자존감이에요.

예배에 목숨 걸지 않아도 괜찮은 나의 양심이 가장 큰 적이에요.

나의 삶을 복음에 합당하도록 십자가 앞에 내어 놓지 못하는 나의 교만이 가장 큰 적이에요.

예배 드리며 말할 수 없는 감격에 빠진 것이 언제입니까?

회개의 뜨거운 눈물이 나의 무릎을 적신 것이 언제입니까?

복음을 전하다가 다가오는 따가운 시선과 비난도 즐거움으로 여긴 적이 도대체 언제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깨어서 우리가 복음의 삶을 살지 못하도록 하는 대적자들에 맞서야 합니다.

그들이 주는 두려움을 물리쳐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를 포함해서 말이죠.

우리 이런 어려움과 두려움에 맞닥뜨렸을 때 혼자 고민하고 시험 들지 맙시다.

우리 교회 이름이 뭡니까?

한마음 교회 잖아요.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교회.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갈 6:2)

성령 충만하더라도 사람인지라 넘어질 수 있고 쓰러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옆에서 손을 잡아 준다면 금새 일어날 수 있고

다시 발 맞추어 걸어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이 공동체로 부르신 이유 아니겠습니까?

한 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협력할 수 있다면

우리는 대적자들의 공격이 있다 할지라도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더 견고히 설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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