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0616 사순절, 예수와 한 마음으로 걷는 믿음의 여정4 – 우리 들으라고 하는 얘기 - 눅15:1-3, 11-32
우리는 지금 사순절을 보내면서
말씀을 통해 예수가 걸어가신 그 길을 되짚어 보고
어떻게 하면 그의 길을 동일한 마음으로 걸어갈 수 있을지 함께 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매우 유명한 말씀입니다.
‘돌아온 탕자’, 혹은 ‘탕자의 비유’라고 따로 이름이 붙을 정도로 많이 인용되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건너 뛰긴 했습니다만 4-7절까지의 ‘잃은 양의 비유’와 8-10절까지의 ‘한 드라크마의 비유’ 역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두 예화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잃은 양 하나 찾기 위해 목자가 온 들판을 헤매듯이,
드라크마 한 닢 (노동자 하루 품삯)을 찾기 위해 온 집안을 뒤집어 엎듯이,
하나님께서는 믿지 않는 한 영혼 구원하는 것을 무엇보다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말씀에서도 한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이 두 예화만 해도 영혼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기에 충분한데
예수께서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 다음 예화를 시작하십니다.
익숙한 이야기지만 다시 한 번 볼까요?
어떤 사람의 두 아들 중 첫째는 착실해서 아비 말을 잘 들었는데, 둘째는 안 그랬던 모양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에게 자신이 받을 유산을 미리 떼어 달라고 떼를 씁니다.
요즘 우스개 소리로 자식한테 대접받고 호강하려면 유산을 미리 뗘주지 말라고 한다지요?
요즘도 그러한데 그 옛날에, 더군다나 가부장 중심의 중동에서 자식이 유산을 미리 달라고 했다는 것은 매우 무례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아버지 죽은 셈 치고 내 살 길 찾아 떠나겠다는 말이니까요.
그럼에도 아버지는 유산을 떼어주었고 그렇게 둘째 아들은 떠납니다.
하지만 보란 듯이 금세 다 날려버리고 거지 꼴이 됩니다.
게다가 흉년으로 먹을 것이 없자 돼지를 치면서 그 먹이라도 먹으려고 하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습니다.
자연스레 풍족한 아버지의 품이 떠오르고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매 한 가지다 싶어 아버지에게로 향합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를 보십시오.
아직 집 근처에 다다르지도 않았는데 둘째 아들을 알아보고 달려와 끌어 안고 그의 잘못을 다 용서해 줍니다.
그리고 전보다 더 극진히 대접해 줍니다.
그 때 이야기 중심에서 빠져 있던 사람이 다시 등장합니다.
첫째 아들입니다.
그 날도 죽도록 일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동생이 왔다고 잔치가 벌어진 겁니다.
화가 단단히 났습니다.
29-30절 말씀 함께 읽어보실까요?
이에 대한 아버지의 대답이 아름답습니다.
“내 것이 다 네 것이잖아. 그런데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왔으니 얼마나 기쁘니?”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버지의 답에 대한 첫째 아들의 반응은 나오지 않은 채로 이야기는 끝을 맺습니다.
앞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잃은 자에 대한 비유를 두 개나 말씀하셨음에도 왜 이 돌아온 아들의 이야기를 하셨을까 궁금했습니다.
그 때 눈에 들어온 것은 오늘 본문 첫 부분인 1-3절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이야기를 하셔야 하는 상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은 누구였습니까?
“모든 세리와 죄인들” 이었습니다.
2절에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리듯이 그들은 죄인이었습니다.
특히 죄인 중에도 세리를 거론한 것은 재물을 죄악시 하는 누가복음 저자가
재물을 부정하게 거둬들이고 사용하는 세리들이 얼마나 사회/종교적으로 지탄을 받고 있었는지 표현한 것입니다.
그 밖에도 죄인들이라 함은 도박꾼, 창녀, 사기꾼, 술주정뱅이 등등 사회적으로 손가락질 당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듣고자 모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잃은 양의 비유와 드라크마의 비유는 자신의 앞에서 말씀을 듣는 죄인들에 대한 변호와 같았습니다.
수군거리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해 예수 자신이 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며,
왜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맛보아야 하는지 일러주신 거예요.
그들도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양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겁니다.
2절 말씀과 같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즉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은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 그 죄인들을 비난하는 한편, 죄인들과 함께 있는 예수마저 정죄하려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습이 어딘가 익숙하지 않으십니까?
조금 전에 우리 함께 이야기했던 탕자의 비유에서 돌아온 아들에 대해 투덜거리며, 그 아비가 죄인인 동생을 영접했다고 단단히 삐친 사람 기억하십니까?
네, 큰 아들이죠.
잃었다가 살아 돌아온 동생을 죄인이라고 정죄하고 이를 받아준 아비에게 볼멘 소리를 하는 모양이 예수를 향해 손가락질 하는 종교 지도자들과 매우 닮아 있습니다.
세리들, 창녀들, 도박꾼들은 인생을 허비하고 죄 중에 살다가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모여듭니다.
아버지를 대신해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는 버선발로 뛰어나가 그들을 맞이하고 그들에게 말씀의 잔치를 베풉니다.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그들의 아픔을 어루만집니다.
그들에게 구원의 소망을 주십니다.
그런데 이를 보는 먼저 믿은 자들,
종교적으로 봤을 때는 의인처럼 보이는 그들이
아버지 품으로 돌아온 그들을 향해 여전히 차가운 시선을 거두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들을 따뜻하게 맞아주는 예수를 죄인 취급해 버립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돌아온 아들의 이야기’는 결국 종교 지도자들 들으라고 하신 이야기에요.
세리들과 죄인들을 정죄하는 종교지도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31-32절입니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너희 종교지도자들아,
너희는 여태껏 바른 신앙교육과 성전중심 생활로 나와 늘 함께 있다고 한 자들이 아니냐
그런데 이 자들을 봐
죄 투성일지라도 아버지에게 돌아왔으니 얼마나 기특하니
얼마나 기쁜 일이니
하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늘 들어왔듯이
이 탕자의 이야기의 중심주제는 잃어버린 자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한 없는 사랑 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닙니다.
둘째 아들처럼 죄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생활한지 조금 되었다고 어느새 첫째 아들처럼 되어서 다른 죄인들을 비난하고 정죄하고 있는 먼저 믿은 자들,
곧 우리의 마음 자세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우리 들으라고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다시 오늘 본문을 대하니까요,
너무 제 이야기 같은 거예요.
이 강단에 서서 예수의 제자다운 삶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정작 저의 삶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던 예수보다는
그런 예수를 손가락질하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모습에 가깝더라고요.
마침 김병년 목사라는 분이 페이스북에 한 책을 소개했습니다.
책 제목은 ‘불편한 진실 내 안의 바리새인’(톰허베스톨, 홍성사)입니다.
목사님은 책 내용 중 핵심 내용을 이렇게 전달합니다.
* 내가 자주 만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 어디서 주로 시간을 보내는가.
* 그리고 자주 하는 일과 하지 않는 일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할 때 대부분이 교회 사람만 나타나고 일반적인 사람들이 내 삶 속에 없다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세상과 분리되는 것이 그들의 목표이다". 이것을 그는 바리새인들의 삶의 방향으로 보았다.
스스로는 교회 안의 거룩한 사람으로 남기 원하면서
정작 그리스도의 사랑이 필요한 자들을 죄인이라고 비난하고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성경에서 예수를 공격하고 비난하던 바리새인들을 나쁜 자들이라고 하면서 어느새 나의 모습은 그 바리새인과 같지 않은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여태까지 신앙 생활하면서 주와 동행하는 삶을 산다고 하지만
첫째 아들처럼
오히려 나에게 잔치를 베풀어 준 적이 있냐고 투덜대요.
내가 달라고 하는 것을 준 적이 있냐고 불평을 쏟아내요.
너무나도 내 중심적이에요.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교회 안의 성도들만을 위해서였습니까?
그의 십자가가 크리스천들의 교양 내지는 품위 유지를 위해서였습니까?
혹시 내가 예수의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가 십자가를 지고 그 분의 길을 따르고 있다고 하면서도
그 십자가 은혜와 사랑을 나누는 데는 인색하지 않았습니까?
어렵게 어렵게 은혜를 구하며 교회로 향하는 사람들을 나와 다르다고 해서 외면하거나 경계하지는 않았습니까?
사실, 말씀을 준비할수록 무섭습니다.
저 스스로는 이대로 살지 못하면서 여러분에게 이렇게 살 것을 권하는 저의 강심장이 무섭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는 세 종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누구나 사랑하며 품으시는 아버지와 예수님,
유산을 탕진했어도 용서를 구하며 아버지를 찾아온 둘째 아들과 같은 세리와 죄인들,
그리고 늘 아버지 곁에 있었지만 타인을 향한 은혜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첫째 아들과 같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아버지를 제외한 두 부류의 사람 중 굳이 택해야 한다면,
늘 죄인의 마음으로 아버지를 향해 달려가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다른 이들을 정죄하고 판단하고…그래서 예수 십자가를 무색하게 만드는 첫째 아들이 아닌,
신앙의 연도나 깊이, 배경과 상관없이
모두 함께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가기로 결심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이 사순절, 예수와 한 마음으로 걷는 믿음의 여정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