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316 사순절, 예수와 한 마음으로 걷는 믿음의 여정5 – 그의 발을 향기롭게 – 요 12:1-8
우리는 지난 주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잃은 자 하나가 되돌아오는 것을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그리고 때때로 큰 아들 같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살펴보았습니다.
먼저 믿은 자의 기득권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잃은 자 하나 얻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던 그 마음으로 우리 역시 잃은 영혼 찾기에 힘쓰자 말씀 드렸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또 다른 형태로 예수와 함께 믿음의 여정을 걷는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와 한 마음으로 십자가의 길을 걷는 믿음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예수께서는 유월절 엿새 전, 베다니 라는 동네에 계셨습니다.
이 곳에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이 기사는 앞 장인 1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놀라운 기적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베다니에 계속 계실 수 없었습니다.
나사로의 부활로 인해 많은 사람이 예수를 따르자 오히려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눅 11:53).
아직 죽을 때가 되지 않았기에 예수께서는 위험의 손길을 피해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계셨는데 다시 그 베다니로 돌아오신 겁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약 3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곧 시작되는 유월절 만찬을 예루살렘에서 하셨는데,
곧 우리가 알고 있는 최후의 만찬입니다.
그러니까 유월절 엿새 전, 살해 위협에도 불구하고 베다니, 즉 예루살렘 근방에 계셨다는 것은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 사실은 12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베다니로 오셨을 때 사람들은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말해주지 않습니다만
동일한 기사를 기록한 마태복음에서는 나병환자 시몬의 집이라고 정확한 거처를 말하고 있습니다 (26:6).
그는 또한 바리새인 이었습니다 (눅 7:36-50)
나사로가 예수와 함께 잔치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으로 보아 예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것에 대해 감사하는 자리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는 예수와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을 위해 열심히 일합니다.
그런데 잔치 중에 일이 일어납니다.
언니 마르다와 함께 주방에서 일을 하고 있어야 할 마리아가 예수 앞에 나타난 겁니다.
그리고 성경의 표현대로, 지극히 비싼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았습니다.
아마 당시 관습 상 비스듬히 기댄 채로 식사들을 하고 있었을 테니까 발을 만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겁니다.
한 번 상상해 보실까요?
남자들이 즐겁게 잔치를 벌이고 있는데 여인 하나가 향유 한 통을 들고 와 다 붓고 머리털로 발을 닦는 그 상황을 말입니다.
말 그대로 매우 당황스러웠을 것 같아요.
일단 이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의 가치가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본문에 드러난 이 향의 가치는 약 300 데나리온 입니다.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 하루 품삯이었기 때문에 300 데나리온이라는 것은 대략 주 6일을 일했을 때 발생하는 일년치의 삯이었습니다.[1]
그럼 이 나드 옥합은 왜 이렇게 비쌌을까요?
자료에 의하면, 이 향유는 ‘나르도스타키 자타만시’라는 식물(아래 그림 참조)의 줄기와 뿌리에서 채취하는데 이 식물은 히말라야 산맥 3000-4000m에서만 자라기 때문에 구하기가 쉽지 않았고, 그마저도 인도나 네팔 등지에서 그 기름을 수입해야 했습니다.
채취되는 양도 굉장히 제한적이어서 뿌리에서 기껏해야 한 두 방울만 채취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생산과정도 어렵고 유통과정도 길었기 때문에 고가로 거래되었습니다.
이 향유가 얼마나 좋았는지 한 번 뿌리면 3일 정도 그 효과가 지속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온 집에 그 냄새가 가득했다고 하죠?
또 장례 절차에도 사용되었는데 이는 더운 날씨로 시체가 부패할 때 나는 악취를 이 향유가 어느 정도 잡아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림(아래)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70-100g 정도의 병에 밀봉되어 유통되었다고 하는데요,[2]
아마 왕와 같은 굉장한 부자가 아닌 이상에야 집에 한 병 있을까 말까 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왕의 사랑을 노래하는 아가서에서 이 향유가 등장합니다.
“왕이 침상에 앉았을 때에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뿜어냈구나” (아가 1:12)
이 귀한 병을 마리아가 깨뜨려서 예수의 발에 부은 것입니다.
마리아가 얼마나 어마어마한 일을 벌였는지 상상이 되시죠?
이해를 돕기 위해 현 시세로 따져볼까요?
지금 우리 나라 최저시급이 6,030 원인데요,
하루 8시간씩 300일을 일했다고 했을 때 받는 세전 금액은 14,472,000원입니다.
이 14,472,000원 짜리 향유를 부은 거라는 말이죠.
물론 이천년 전 경제 상황과 지금을 단순 비교할 수 없기에 딱 맞아 떨어진다고 할 순 없습니다만,
100g 짜리 향유 병 하나의 가치가 실로 엄청났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 일이 벌어지자 실제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고 당황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가룟 유다가 이것을 지적했다고 말합니다만,
다른 복음서에 보면 ‘제자들’, 혹은 ‘다른 이들’이라고 말함으로써 예수를 빼고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매우 놀랐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아마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르죠.
‘아유, 왜 저렇게 유난이야?? 자기만 신앙 생활하나?’
5절은 가룟 유다의 말입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모든 사람이 당황한 상황이었기에 가룟 유다의 말은 매우 설득력 있게 들렸을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은 구약 시대부터 하나님께서 강조하셨던 것이었고 예수께서도 사역 시작하실 때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말씀을 선포하셨기에 더욱 옳게 들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6절은 우리에게 무서운 반전을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비싼 향유병이 깨지고 모두가 당황하여 놀라는 그 순간에 유다의 머리는 빠르게 굴러갔습니다.
어쩌면, 마리아가 나드 옥합을 들고 나타난 순간부터 저 향유병이 얼마짜리이고 그것을 헌금하면 자신이 얼마를 훔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 앞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는 척하면서 예수의 제자답다는 명분도 챙기려 했습니다.
그의 말과 행동이 언뜻 보면 옳아 보였지만 그 중심은 그렇지 않았음을 성경은 지적합니다.
오늘 본문의 표현대로, 그는 도둑이었습니다.
반면, 정작 그 비싼 향유를 깬 마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 비싼 향유를 깼는데 그게 무슨 말입니까? 라고 따지지 않았어요.
내 자존심 구겨가며 섬겼는데 당신이 왜 이래라 저래라 합니까? 하고 항변하지도 않았어요.
그녀는 그저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의 발을 닦을 뿐이었습니다.
이 모습이 또한 우리를 당황스럽게 합니다.
머리카락으로 상대방의 발을 닦기 위해서 몸을 숙이다 못해 완전히 엎드려야 합니다.
특히 여자에게 있어 머리카락은 미와 자존심의 상징일 텐데 그 머리카락으로 사람 몸의 가장 낮은 곳에 있는, 그것도 때와 먼지로 얼룩지고 냄새 나는 발을 닦는다는 것이 상상이나 되십니까?
여인이 자신의 모든 아름다움을 포기한 채 그 머리카락으로 다른 이의 발의 때를 닦아내고 있는 그 상황이 말입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비판하는 자들에게 욱할 법도 한데 아무 말 없이 계속 발을 닦고 있는 그 모습이 말입니다.
따지고 보면, 경제적인 면에서나 자존심 면이나 어느 것 하나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장면이 없습니다.
오히려 가룟 유다의 말이 타당하게 들릴 정도니까요.
하지만 주께서 누구의 편을 들어 주셨습니까?
7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시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아까 나드 향유를 설명 드리면서 이 기름이 장례 절차에 쓰인다고 말씀 드린 것을 기억하시나요?
예수께서는 마리아의 행동을 단순히 감정 혹은 충동으로 인해 값비싼 재물을 낭비한 것으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 여자는 내 장례식을 내다보고 예를 표한 것이다…” (12:7, 메시지 성경)
오늘 본문에서 마리아와 가룟 유다와의 명확한 차이가 보이십니까?
그들의 차이는 ‘누가 더 상식적이었느냐’ 가 아니었습니다.
‘누가 예수와 그의 사역을 정확히 믿고 따랐느냐’ 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치욕과 저주의 십자가, 그러나 모든 사람을 구원할 그 생명의 십자가로 향하는 예수의 그 발걸음을 이해했느냐 혹은 못했느냐에 따라 그 차이가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3년이란 짧지 않은 시간 예수를 따라다니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듣고
귀신이 떠나가고 병자가 치유 받는 등 온갖 기적이 일어나는 그 현장에 있었지만
예수의 이름으로 자기 잇속 챙기기에 여념이 없던 자였습니다.
그에게 있어 예수가 짊어질 십자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랬기에 단돈 은 30냥에 예수를 팔았겠지요.
그러나 마리아는 알았습니다.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예수의 그 발이 얼마나 아름답고 고귀한지,
그래서 자신의 그 값비싼 향유를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닦는다 해도 전혀 아깝지 않음을 그녀는 알았던 것입니다.
그녀의 헌신이
온 인류를 위하여 십자가로 향하는 예수의 그 발걸음을 더 향기롭게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이튿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십니다.
그 발에 아름다운 향기를 가득 품고서 말이죠.
동일한 이야기가 기록된 마가복음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막 14:9)
그리고 실제로 마태복음, 누가복음, 그리고 오늘 본문까지 이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심지어 오늘 본문의 앞장인 11장 2절에서 오늘 본문을 미리 소개함으로써 말 그대로 예수의 복음이 소개되는 곳마다 마리아의 이 행동 역시 소개되며 기념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과연 어떤 사람입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다른 이들 보기에 참 옳은 소리하는 종교인이지만
예수의 십자가를 아무 의미 없이 바라보는,
심지어는 나의 이익을 위해 그 예수를 다시 한 번 죽음으로 몰고 가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남들이 보기에는 미친 것 같아도, 다소 과해 보여도,
자신의 모든 것을 깨뜨려서 그 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길을 향기롭게 하는 사람입니까?
[1] Mark Allan Powell, ed., “Nard,” The HarperCollins Bible Dictionary (Revised and Updated) (New York: HarperCollins, 2011), 689.
[2] http://www.haeunchurch.com/board_ljxq48/43137
http://www.koreanbiblestudy.org/kbsmain/word/pure_nard.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