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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716 예수를 찾는 간절함에서 부활의 기쁨으로 – 요 20:1-18


오늘은 참으로 기쁘고 즐거운 부활주일입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님의 부활을 믿으십니까?

하지만 예수님과 함께 있던 사람들은 오히려 이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알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수 차례 자신이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죽으러 왔다고 말씀하셨음에도 제자들이 어디 그 말을 믿었습니까?

베드로는 왜 죽느냐고 대들었다가 혼나지 않았습니까?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죠.

지난 주 나눈 말씀처럼,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그 순간까지도

제자들이 평화의 왕이라고 환호는 했지만 그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사야에서는 이런 모습마저 기가 막히게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가 체포되어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사람들 중에 그가 죽임을 당하게 된 것이 자기들의 죄 때문이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사 53:8, 현대인의 성경)

그렇게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이해하지 못했기에 정작 그의 죽음 앞에서 그들은 당황하고 놀라고 두려워서 도망갔고 숨어버렸습니다.

그렇게 숨어버린 제자들과 달리 예수의 무덤에 나타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여러 명의 여인이 등장합니다만, 요한복음은 마리아에게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을 찾아오긴 했지만 역시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실 것을 믿었기 때문에 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해 여인들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시는 길을 울며 함께 뒤따랐기에 뿔뿔이 도망친 제자들 보다는 나았습니다만,

그들 역시 예수의 죽음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너무 당황스러운 나머지 다시 살아나리라 하신 주님 말씀을 새까맣게 잊었던 거죠.

공교롭게도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찾아간 것이 부활을 믿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없습니다만 누가복음에서는 여인들이 향품을 준비해서 예수의 무덤으로 갔다고 이야기합니다 (눅 24:1)

다시 말해, 그들은 안식일 바로 전날 오후에 예수께서 돌아가셨기에 미처 향품을 바르지 못했고 안식일이 끝나자 마자 그 향품을 시체에 바르려고 가져왔던 겁니다.

즉, 그들은 예수께서 여전히 죽은 채로 있다고 생각하고 무덤에 온 것이죠.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왔는데 무덤 문이 열려 있으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지금도 당연히 그렇습니다만 시체가 무덤 밖에 나와있다는 것은 문화적으로 치욕스러우면서도 공포스러운 일이었으니까요 (삼상 31:9-13)[1].

혼비백산해서 제자들이 숨어 있는 곳으로 달려갑니다.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찾아가 예수의 시체가 도둑 맞은 것 같다며 울부짖습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는 바로 요한복음의 저자라고 알려진 세배대의 아들 요한입니다.

마리아의 이야기를 들은 두 제자가 지체하지 않고 무덤으로 달려가지요.

재미있게도 오늘 본문은 두 제자가 달려가는 모습을 그립니다.

아무래도 한 살이라도 젊은 요한이 베드로를 앞질러 뛰어갑니다.

또 누구보다 사랑하는 주님의 무덤이 비어있다는 사실을 빨리 확인하고 싶었겠지요.

이 요한은 열두 제자 중 유일하게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실제로 본 사람이기에 더욱 궁금했을 겁니다. (요 19:26-27).

다른 누구보다 빨리 확인하고픈 마음으로 달려왔건만 무덤 앞에서 멈춰섭니다.

떨리는 마음에서 였을까요?

그렇게 주춤하는 사이 성격 급한 베드로가 무덤으로 쑥 들어갑니다.

아닌 게 아니라 예수께서는 거기에 계시지 않았어요.

그제서야 요한도 뒤따라 들어가서 확인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 본문은 그 두 제자가 빈 무덤을 보았음에도 예수의 부활을 아직도 믿지 못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9절을 같이 읽어보실까요?

단순히 예수의 말씀뿐만 아니라 성경에서 그의 부활을 말하고 있었지만 제자들은 도통 이를 믿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들은 그저 이상하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갈 뿐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경주를 벌이듯 무덤을 확인하러 왔다 간 사이에 막달라 마리아도 다시 무덤으로 돌아온 모양입니다.

마냥 서서 울고 있다가 혹시나 하고 무덤 안을 들여다 봤는데 예수께서 누우셨던 곳에 두 천사가 앉아 있는 겁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보지 못한 천사가 마리아 앞에 나타납니다.

천사들과의 대화도 잠시 마리아는 곧 인기척을 느낍니다.

그녀의 뒤에 그토록 찾던 예수께서 서 계셨습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마리아는 그토록 찾는 예수를 바로 앞에서 보면서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동산지기 인 줄 알고 예수의 시신이 있는 곳을 알려달라고 떼씁니다.

그 때 예수께서 인자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부릅니다.

“마리아야”

한 번 생각해 보실까요?

가장 믿고 따르고 사랑하던 사람이 죽은 것도 억울하고 팔짝 뛸 노릇인데,

그의 시신마저 없어진 상황이에요.

울며 불며 이리 저리 찾고 있는데

내가 찾던 그 분의 부드러운 음성이 내 이름을 부르는 거예요.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야말로 극도의 당혹감이 최고의 기쁨으로 바뀌는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저 같았으면 다리 힘이 풀렸을 것 같아요.

그런 마리아에게 예수께서는 자신이 승천할 것을 말씀하시며 이를 제자들에게 가서 이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그렇게 제자들에게 가서 전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막달라 마리아와 베드로, 그리고 요한 이 세 사람은 예수의 무덤이 비어있다는 것을 모두 두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예수 부활의 첫 목격자들인 셈이죠.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빈 무덤을 목격한 다음입니다.

같이 빈 무덤을 보았지만 그 자리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진짜로 만난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를 가장 가까이에서 따르던 수제자 베드로도 아니었고요,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 요한도 아니었어요.

바로 일곱 귀신 들렸던 여인 막달라 마리아 이었어요.

성경에 언급된 횟수나 당시 관습상으로 볼 때,

늘 곁에 있던 수제자에게 먼저일 것 같고

그도 아니면 아끼던 제자에게 보이실 것도 같은데

이런 남자 제자들도 아닌,

그것도 귀신 들렸던

여인에게 나타나신 겁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그녀에게 부활 후 가장 첫 번째 명령을 주십니다.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형제들이 누구겠습니까?

예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를 배반하고 부인하고 부활하신 것마저 모른 채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들을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는 예수의 사랑에 눈물이 납니다.

그들에게 가서 전하라는 겁니다.

여기에서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왜 다른 제자들이 아닌 마리아 앞에 나타나셨고 그녀에게 ‘가서 전하라’는 첫 번째 사명을 주셨을까요?

표면적으로 생각하면

막달라 마리아가 가장 먼저 예수를 찾아 무덤에 왔던 자이고

또 제자들이 집으로 돌아갔을 때에도 무덤 곁에서 예수를 찾았기 때문에 예수께서 그녀를 만났을 거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네, 맞습니다.

하지만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본문 전체에 흐르는 막달라 마리아의 간절함 입니다.

역설적이게도, 그녀가 간절하게 예수를 찾는 분주함 때문에 예수의 부활이 더 확실하게 표현됩니다.

쉽게 말해서, 그녀가 예수가 없어졌다고 여기 저기 뛰어다니고 울고 불고 하는 바람에 그 무덤에 예수가 없다는 것이 정말 확실하게 드러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간절하게 예수를 찾아 다녔습니다.

그 간절함을 주께서 기뻐하셨습니다.

그 간절함을 보시고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그 간절함을 보시고 온유한 음성으로 마리아를 부르셨습니다.

그 간절함을 보시고 귀중한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과연 우리에게는 마리아와 같이 부활의 주를 찾고자 하는 그 간절함이 있습니까?

막달라 마리아의 간절함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또 있습니다.

예수 보기를 간절히 원했던 만큼 어떻게 예수를 만났는지 생생히 전합니다.

동시에 예수께서 이르라 하신 이야기를 그대로 가서 전합니다.

그녀의 간절함은 그저 감정적인 혹은 충동적인 것이 아니라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간절함이었습니다.

쉽게 예를 들자면,

한 동안 한국 교회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경배와 찬양 예배가 크게 일어나고 예배 중 선교에 대한 부름이 활발할 때가 있었습니다.

간절하게 은혜를 사모하던 많은 청년들이 예배 드리던 중 선교사로 헌신하겠냐는 도전에 덜컥 서원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문제는 그 서원이 실제 선교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는 것이죠.

반면, 마리아를 보십시오.

간절히 바라던 대로 예수를 만났고 예수가 원하는 것을 바로 실행에 옮겼습니다.

제자들이 믿건 말건,

예수께서 전하라 하신 말을 그대로 전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께서는 무덤에 계시지 않습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모든 저주와 슬픔과 고통과 아픔을 다 이겨내시고 우리에게 참 자유와 승리와 기쁨을 주셨습니다.

이렇게 승리하신 부활의 주님을

우리 모두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간절함으로 만날 수 있길 바랍니다.

마리아와 같은 간절함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주의 음성에 바로 응답할 수 있길 바랍니다.

마리아와 같은 간절함으로 부활하신 우리 주님을 널리 전할 수 있길 바랍니다.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신 부활의 주님,

그 귀하신 이름이

여러분을 통해 온 세상에 퍼져 나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1] George Raymond Beasley-Murray, John, Word Biblical Themes (Dallas: Word Pub., 1989), 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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