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0316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을 때” 요 20:19-13
우리는 지난 주 참 기쁘고 은혜로운 부활절을 보냈습니다.
정성스레 준비한 계란을 이웃들에게 나눠주며 우리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증거했습니다.
또 예배와 모임 중 그 부활이 우리에게 얼마나 귀중한 능력이 되는지 말씀으로 함께 나누었습니다.
특별히 말씀 가운데 나타난 막달라 마리아의 간절함을 보면서 우리 역시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 위한 간절함을 소망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이후 사건입니다.
지난 주 말씀에 의하면,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가 무덤에서 없어졌다고 제일 먼저 찾아가 알린 것이 누구였습니까?
예수의 제자, 베드로와 요한이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같이 있었겠습니다만 예수의 무덤으로 뛰어갔던 것은 이 둘뿐이었지요.
그 후에 마리아가 예수를 실제로 만난 뒤에 또 찾아간 곳이 어디입니까?
주의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습니다.
주께서 “내 형제들에게” 가서 전하라고 하셨고 마리아는 이에 순종한 겁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시각,
즉,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라는 시각은 이미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대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마리아를 통해 들어서 알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들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아놓고 있었습니다 (19절).
베드로와 요한이 빈 무덤을 직접 보았고
마리아가 와서 예수를 보았노라 말했지만
제자들은 예수가 살아나셨다는 기쁨을 누리기 보다
여전히 예수를 죽인 유대인들이 자신들도 찾아 죽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어요.
그런데 바로 그 때 예수께서 거기에 나타나신 거예요.
이거 말 그대로 놀랠 노자 아닙니까?
모인 곳의 문들을 모두 다 닫아놓고 있었어요.
아무도 그들을 찾지 못하길 바라는 마음 뿐이었어요.
그런 그들 한 가운데 지금 예수께서 서 계시는 겁니다.
그러면서 인사하시는 거죠.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여기에서 평강은 shalom(히) 혹은 eirene (헬) 라고 합니다.
같이 해보실까요?
Shalom / eirene
평강을 비는 것은 일종의 인사였어요.
우리도 오랜만에 만나면 그간 안녕하셨어요? 라고 묻듯이 묻는 그런 인사였어요.
그런데 여기 예수께서 말씀하신 평강이 그저 가벼운 인사이기만 했을까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평강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평강이었어요.
꽁꽁 걸어 닫은 문도 막지 못한 평강이었어요.[1]
세상의 그 어떤 형식적이고 때로는 가식적인 평화가 흉내 낼 수 없는 부활하신 주의 평강이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다음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몸을 제자들에게 보이신 거예요.
간혹 사람들이 말합니다.
예수의 부활이 거짓말이다.
부활했다손 치더라도 마치 죽은 뒤 귀신이 되는 것처럼 영혼만 그렇게 나타난 거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그의 손과 옆구리를 보이셨어요.
손과 옆구리를 보이셨다는 것은
그의 손에 남은 흔적,
즉 대못이 뚫고 지나간 못 자국을 보이셨다는 겁니다.
깊이 패인 그의 옆구리를 보이셨다는 겁니다.
예수께서는 죽은 몸 그대로 살아나셨습니다.
그 예수를 보고 제자들이 비로소 기뻐합니다.
예수를 보고, 특히 구멍 난 손과 패인 옆구리를 보고 그들의 두려움이 기쁨으로 바뀐 것입니다.
예수가 죽었다는 사실에 두려워 떨던 그들의 마음이 기쁜 마음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기쁨을 회복한 그들에게 주께서는 사명을 주십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사명을 주셨듯이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아 죄 사함의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예수께서 제자들을 만나시고 평강을 빌어주셨는데 하필이면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회식을 하거나 모임을 가질 때 꼭 빠지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맛있는 것을 먹었다는 소리라도 들으면 자기 혼자 빼 놓고 그랬다고 삐쳐요.
여기 그런 사람이 있어요.
24절 이후에 나타난 대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 라는 제자 였습니다.
디두모는 쌍둥이라는 뜻입니다.
자료에 의하면, 원래는 유다 도마였는데 가룟 유다와 헷갈리는 것을 피하기 위해 디두모라는 이름이 붙었다고도 하고요,
예수와 마치 쌍둥이처럼 닮았다 해서 디두모라는 별칭이 붙었다고도 합니다.[2]
그는 매우 열심이 있는 제자이기도 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16절) 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예수를 따르는 열심이 있던 제자가 예수의 부활 소식을, 그리고 그가 나타나셨음을 들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25절을 같이 읽어보실까요?
내가 만져보지 않고는 못 믿겠다는 거에요.
내가 직접 두 눈으로 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는 겁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아닌가요?
사람들이 우리의 신앙을 비판하고 공격할 때
‘대체 하나님이 어디 있어? 보여줄 수 있어? 네가 만나봤어? 만져봤어?’ 라고 말합니다.
지금 예수의 제자 도마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얼마나 세게 이야기했는지 다른 제자들이 더 말을 못하고 그렇게 8일이 지납니다.
여전히 제자들이 있는 집은 문이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도마도 함께 있었고요.
그 때
예수께서 나타나서 또 이르기를,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놀랄 틈도 없이 예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십니다.
27절 같이 읽어보실까요?
25절과 비교해서 보시겠습니까?
도마가 내가 그 못 자국과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한 그 말을 듣기라도 했듯이
자신의 손과 옆구리에 넣어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분명 도마가 못 믿겠다고 투덜거릴 때 예수께서는 그 자리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도마의 한 말을 분명히 알고 계셨어요.
도마가 얼마나 놀랐을지 상상이 가십니까?
바로 고백합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자신의 동료들이 얘기할 땐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부활하신 예수가 바로 자신 앞에,
그것도 자신의 말을 들은 듯이 대답하고 계시는 모습에
그제서야 비로소 예수를 단순한 스승에서 자신의 주인으로, 그리고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보지 못하고 믿은 자들이 더 복되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의 이 말씀대로라면 우리는 참 복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직접 보지도 못하고
그의 죽음이나 부활의 현장에 직접 있지도 않았지만
우리는 예수를 믿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이렇게 모여 예수를 예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복된 사람들입니다.
믿으십니까?
우리가 더욱 복된 이유는
예수를 주로 믿고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다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31절을 함께 읽어보실까요?
31절에서 ‘이것’은 오늘 본문이 포함된 20장에 기록된 예수의 부활 사건을 가리킵니다.
이 부활 사건을 기록한 이유가 뭐라고 합니까?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이름, 즉 예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는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영원한 생명을 소망하십니까?
그렇다면 예수께서 그리스도시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으십니까?
이 31절의 말씀은 사실 오늘 본문에서 실제 일어난 일입니다.
무슨 이야기냐고요?
오늘의 첫 번째 이야기를 생각해 보시지요.
제자들은 극심한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참 평강을 얻게 된 것은 언제입니까?
바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다음부터 입니다.
예수를 만난 다음 그들은 참 평강이 주는 기쁨을 누리고 죄를 사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과 사명을 받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도 생각해 보실까요?
도마는 의심으로 그의 마음을 꼭꼭 닫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이 풀리고 참된 신앙의 고백을 하게 된 것은 언제입니까?
바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다음부터 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동일합니다.
우리 인생에 두려운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낙심되고 힘들고 어렵고 짜증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내 삶에 평화라는 것은 도무지 있지가 않아요.
그런데 예수를 만나면 달라지는 거에요.
돈을 많이 벌고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고
친구들을 많이 만나고
몸이 건강하다고 해서 내 삶에 평강이 넘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부활하신 예수를 만날 때 그 놀라운 평강이 넘치는 겁니다.
의심이 들 때도 마찬가지 입니다.
교회를 다니기는 해도
도무지 성경에서 나온 말이 믿어지지 않고
성경 말씀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참 우스워 보여도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예수를 진정 만나기만 하면 이 모든 것이 믿어지는 거예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온 세상의 구원자인 것이 믿어지는 거에요.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는 거예요.
언제요?
예수를 만날 때.
혹시 삶 가운데 다른 사람들한테 말할 수 없는 두려움과 아픔, 고통과 우울함이 있으시다면,
지금 당장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부활의 주님이 주시는 평강이 나의 평강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끊임없이 일어나는 의심으로 신앙의 회의를 느끼는 분은
오히려 성경을 더 많이 보시길 부탁 드립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기록하여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생명을 얻게 한다는 31절 말씀처럼
이 책에는 감출 수 없는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참 사랑과 평화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다른 이름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가 우리의 주님이시고
오직 예수의 이름이 우리의 구원이 되십니다.
[1] The point the author makes here is simply that the closed doors were no obstacle at all to the resurrected Jesus. Biblical Studies Press, The NET Bible First Edition Notes (Biblical Studies Press, 2006), Jn 20:19.
[2] Aaron K. Tresham, “Thomas the Apostle,” ed. John D. Barry et al., The Lexham Bible Dictionary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12, 2013, 2014,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