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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016 사랑의 초대 – 요 21:1-14


우리는 두 주에 걸쳐 예수께서 부활하신 뒤에 제자들을 만나시는 장면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는 예수께서 평화를 비셨을 때, 그 겁 많던 제자들이 비로소 기쁨을 누리고, 의심 많던 도마가 예수를 주님으로, 그리고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예수를 만날 때 우리의 모든 두려움과 의심은 사라지고 참된 평화와 영생의 기쁨을 누린다고 함께 나누었습니다.

자, 오늘 말씀은 어떻게 시작하나요?

“그 후에 예수께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1절) 라고 말합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보이시고

방 안에 있던 제자들에게 보이시고

이제 세번째 보이신 이야기를 할 거다 라고 1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왜 세 번이나 그것도 다른 방법으로 자신을 나타내셨을까요?

2절에 보시면 베드로와 도마를 포함해서 총 7명의 제자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물고기 잡으러 간다고 하니까 모두 함께 가겠다고 일어섭니다.

그들은 분명 예수를 따라 다니면서 더 이상 물고기를 잡지 않았었는데 다시 바다로 나갑니다.

왜 그랬는지 정확히 말씀해 주지는 않습니다만, 숨어있기만 하는 것도 답답해서 그러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그런데 더 답답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한 마리도 못 잡은 거에요.

밤 새 그물을 던졌는데 단 한 마리도 못 잡은 겁니다.

아무리 예수를 따라다니는 3년 동안 그물을 안 잡았다손 치더라도 명색이 물고기 잡기로 잔뼈가 굵은 어부들 아니었습니까?

베드로나 세배대의 아들들 모두 물고기를 잡다가 혹은 관련 일을 하다가 제자로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왜 한 마리도 잡을 수 없었을까요?

당사자들에게는 꽤나 답답한 상황이었겠지만 그 다음 이어지는 이야기를 통해 이것이 오히려 중요한 장치임을 보게 됩니다.

이리 저리 그물을 던지고 있는 사이

해변에 예수께서 나타나셨어요.

그런데 제자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어요.

그 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얼마나 잡았냐고 물어보시죠.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는 그들에게 배 오른편으로 던지면 잡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그 다음을 어떻게 이야기합니까?

6.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기가 막히죠?

바다 물이 바뀐 것도 아니고

더 좋은 그물을 쓴 것도 아니고

분명 아까 던져봤을 법한 곳인데

던지라고 하는 대로 던지니까 엄청난 수의 물고기가 잡힌 겁니다.

이 이야기를 보는 우리도 이게 상식적으로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되는데

그 당사자들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이 와중에 요한은 이렇게 할 수 있는 분은 예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한 듯 합니다.

베드로에게 주님이시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잠깐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께서 부르셨던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자리를 돌아갔을 때

그들은 오히려 아무것도 건질 수 없었어요.

하지만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이 그 말씀에 순종했을 때 그들은 상식을 뛰어넘는 놀라운 결과를 마주하게 됩니다.

혹자는 이것을 가나 혼인 잔치 때 예수의 말씀에 순종했던 그 집의 종들이 마주했던 기적 (요 2:1-10),

즉, 물이 맛있는 포도주로 변하는 그 사건과 연관시키기도 합니다.[1]

그 때도 그 집의 하인들이 예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했을 때 그런 기적을 경험한 것 아니겠습니까? (요 2:5, 9)

여러분도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날마다 기적 같은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어쨌든, 그런 놀라운 일이 벌어졌고 저 앞에 서 계신 것이 주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성격 급한 베드로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죠?

주께 가고자 당장 바다로 뛰어 내립니다.

그런데 조금 어색한 부분이 보이시나요?

7절을 보시면 대부분 물에 뛰어들려면 옷을 벗는 것이 정상인데,

지금 베드로는 옷을 벗고 있다가 겉옷을 챙겨 입고 바다로 들어갑니다.

이것은 당시 풍습을 이해하면 도움이 됩니다.

당시 운동할 때 남자들이 옷을 홀딱 벗고 했었는데요,

수영을 할 때도 옷을 아주 다 벗었다고 해요.

물고기를 잡을 때도 마찬가지였겠지요.

그러니까 지금 베드로는 아주 홀딱 벗은 상태였던 겁니다.[2]

하지만 예수께 갈 때 올 누드로 갈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겉옷을 두른 겁니다.

그 사이 다른 제자들도 배를 몰고 왔습니다.

그리고 해변으로 올라왔는데 거기에 뭐가 있었나요?

9절을 함께 읽어보시겠습니다.

자, 여기서 요 18:18을 잠깐 읽어보실까요?

베드로가 예수께서 끌려가시던 것을 따라와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 뜰에 서 있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 뜰, 그 모닥불 앞에서 베드로는 예수를 세 번 부인합니다.

다시 본문 9절로 돌아가 보실까요?

해변에 뭐가 있었다고 합니까?

누가 이렇게 준비해 놓았나요?

베드로가 이 숯불을 보자마자 무엇이 생각났겠습니까?

표현이 좀 그렇습니다만, 예수님이 좀 짓궂으십니다.

가뜩이나 예수를 부인한 것이 자책이 되고

그 미안한 마음에 주를 뵈려고 부리나케 옷이 젖는지도 모르고 뛰어왔는데

딱 올라와보니까 숯불이 있는 거예요.

자연스레 그 때 기억이 다시 떠오를 수 밖에 없었겠지요.

베드로의 이런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예수께서는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가 아마 총알처럼 튀어나갔겠지요.

어떤 주석의 설명처럼, 물에 뛰어들어 예수께 가고자 했던 베드로의 열정이 그 말씀에 순종하려는 열정과 딱 맞아떨어지는 순간이기도 합니다.[3]

그 때 물고기가 가득 담긴 그물을 끌어당기는데 총 153 마리가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요한복음 저자가 정확한 숫자를 밝힌 이유는 이 사건의 사실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라고도 합니다.

그 많은 물고기를 담고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참 놀랍습니다.

자료에 의하면, 베드로와 제자들이 잡은 물고기 (Peter’s fish) 는 종에 따라 최대 60 센티미터 길이에 무게 4 킬로그램까지 자란다고 합니다.[4]

이 4킬로그램 물고기가 153마리가 잡혔다고 생각해 보시지요.

조금 작은 물고기들이 잡혔다고 해도 600 킬로그램에 달하는 엄청난 무게입니다.

그럼에도 그물은 전혀 찢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엄청난 물고기 수나 그물이 전혀 찢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오늘 본문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아닌 듯 합니다.

예수께서 그 물고기를 다 가져오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그 중에 조금 가려와라 하셨거든요.

사실 그 다음의 장면이 더욱 중요합니다.

12절을 함께 읽어보실까요?

“…와서 조반을 먹으라…”

예수의 십자가 고난을 다룬 영화 ‘The Passion of Christ’ 에서 보면 예수께서 제사장의 뜰에서 온갖 모욕을 당하실 때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고 돌아서면서 예수와 눈이 마주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영화 상 연출입니다만, 예수께서 베드로의 부인을 예언하셨던 것처럼 실제로 그리 했고, 주께서 이를 즉시 아셨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처럼 숯불을 통해서 그 사실을 다시 기억나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꾸중하지 않으셨어요.

내치지도 않으셨어요.

내칠 거면 제자들이 있는 이 해변에 나타나시지도 않았겠죠.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노라 큰 소리치던 제자들이 다 배신하였음에도 그 연약함 꾸짖지 않으시고 찾아와 다시 말씀하시는 거에요.

‘이리 와서 같이 밥 먹자’

여러분 같으면 철썩 같이 믿었는데 배신하고 사기 친 사람이랑 같이 아침 드실 수 있으시겠어요?

기껏 정성을 다해 가르치고 돌봐줬는데 내 이름에 먹칠한 그 사람이랑 아침밥 드실 수 있으시겠어요?

하지만 우리 주님은 지금 그렇게 하고 계십니다.

손수 아침 준비를 다 하시고 초청하십니다.

그리고 13절 말씀대로 손수 나눠주십니다.

종교 지도자들에게 잡히시던 날 밤 함께 식사하며 떡과 포도주를 나눠주셨던 것처럼 말이죠.[5]

즉, 완전한 관계의 회복이 이뤄졌음을 말씀합니다.

이 해변에서 벌어진 아침 식사 초대는 우리 주 예수의 변함없는 사랑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주님 주신 사명대로 살지 못하고

심지어 예전에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조롱하며

불평과 불만으로 하늘을 향해 손가락질 했었더라도

주님은 못 자국 난 그 손으로 손수 아침 밥을 차려 놓고 우리를 부르세요.

“와서 먹으라”

이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지 시편 기자는 이렇게 찬양합니다.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가면 없어지나니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

곧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의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시 103:11-18)

주께서는 제자들의, 그리고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거예요.

먼지 같고, 들의 풀과 같고, 지나가는 바람 같은 인생이지만 이런 우리를, 그의 말씀을 따라 행하려는 자들을 주께서는 자식을 품듯이 영원한 긍휼로, 그 자비하심으로 품어주신다는 겁니다.

믿으십니까?

첫 번째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을 때 주님은 그녀를 통해 자신이 부활했음을 제자들에게 알리셨고

두 번째는 직접 나타나셔서 평강을 전하셨어요.

오늘 본문, 세 번째 나타나셔서 그들을 향한 사랑이 변함 없음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읽지는 않았습니다만, 15-19절 말씀을 통해 스스로가 보여주신 그 사랑을 본 받아 양을 먹이라고, 즉 귀한 사명을 감당하라고 베드로에게 부탁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 살기 참 힘드시죠?

돈 버는 것은 왜 이렇게 또 어려울까요?

하지만 이것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내가 내 인생 아무리 열심히 살려고 애쓰고 바동거려도

예수의 말씀과 그 사랑 없는 인생은 결국엔 빈 그물을 거둘 뿐입니다.

답답하고 어렵고 힘들수록 우리를 찾아와 말씀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십시오.

빈 그물만 바라보지 말고

벌써 가까이에서 오른쪽으로 그물을 던지라고 하는 주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리고 나를 부르시는 주의 음성에 순종하십시오.

그 분의 사랑을 따라 서로 사랑하기에 힘쓰십시오.

그럴 때 우리는 단순히 153 마리라는 물질의 축복보다 더 큰 주의 사명을 감당하는 자들이 될 줄 믿습니다.

[1] Biblical Studies Press, The NET Bible First Edition Notes (Biblical Studies Press, 2006), Jn 21:11.

[2] John D. Barry et al., Faithlife Study Bible (Bellingham, WA: Logos Bible Software, 2012), Jn 21:7.

[3]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Jn 21. https://www.biblegateway.com

[4] https://en.wikipedia.org/wiki/Tilapia

[5] John D. Barry et al., Faithlife Study Bible (Bellingham, WA: Logos Bible Software, 2012), Jn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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