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041716 선한 목자의 사랑 - 요 10:22-30


오늘 본문이 포함된 요한복음 10장은 예수께서 자신을 선한 목자에 비유하셔서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신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 10장을 요한복음에서 예수 사역의 정점을 찍는 부분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1]

본문 앞의 내용을 대략 말씀 드리자면,

도둑이나 강도는 울타리를 넘어 양을 해하려 하지만 예수께서는 선한 목자요, 양의 문으로써 양 하나 하나 이름을 불러가며 생명을 더 풍성히 누리게 한다 말씀합니다.

그래서 위험이 닥쳤을 때에 삯꾼은 도망가지만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시며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의연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위험에 대처하는 자세에 대해 예를 들자면, 세월호가 기울었을 때 선장과 직원들은 자기들만 살고자 도망갔지만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구하자고 배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한 기사에 따르면 선박직원들의 생존율은 100%인데 반해, 14명의 선생님 중 단 3명만 살아남았고 그 생존율은 21 %에 그쳤습니다.[2]

이런 삯꾼과 선한 목자의 차이를 예수께서 말씀하셨지만 유대인들, 특히 종교 지도자들이 곧이 곳대로 믿고 따를 리가 없겠지요.

그래서 ‘선한 목자니, 양의 문이니 하는 비유 말고 예수 당신의 정체를 뚜렷하게 말하시오’ 라고 도전해 오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이 그리고 있는 장면입니다.

때는 수전절이자 겨울이었습니다.

수전절은 빛의 축제 혹은 하누카 라고 하고요,

유대인들이 아주 중요하게 여기며 지키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그 이유와 역사적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역사에 따르면 주전 167년에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라는 왕이 예루살렘에 쳐들어와 8만명에 이르는 사람을 학살하고, 유대교를 탄압하여 율법을 불태우며, 할례를 행하지 못하게 하고,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가져다 놓고, 유대인들이 싫어하는 돼지를 제사 지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유다 마카비와 그 형제들이 군사를 일으켜 3년의 전쟁 끝에 침략군을 물리치고 주전 165년에 승리했다.

수전절이라는 이름은 전쟁에 승리한 이들이 성전을 회복했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유대인들이 헬라 이방인들을 물리치고 성전에 들어 갔을 때 버려진 등잔을 찾고 불을 켜려고 하는데 하루 분의 양의 기름밖에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을 켜니 8일간을 불이 붙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적이었다. 제사장들은 이 8일 동안에 성전을 다시 정결케 할 수 있었고, 새 기름도 준비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날을 빛의 날이라고도 한다.[3]

그래서 지금도 유대인들은 대림절과 성탄절이 아닌 촛불을 켜고 하누카 절기를 보냅니다.

그러니까 22절에 ‘때는 겨울이’라는 말이 딱 맞습니다.

혹자는 다음 절에 나타난, 예수께서 행각에서 거니신다는 말이

곧 이 추운 겨울 날씨를 피하기 위해서라고 하더군요.[4]

이 솔로몬의 행각은 그림에서와 같이 벽이 없이 기둥과 지붕으로만 이루어진 건물입니다.

이 곳은 이방인들도 비교적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고,

토론과 교육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곳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 예수의 제자들이 이곳에서 이방인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어쨌든, 예수께서는 겨울에 그곳을 거닐고 계셨어요.

유대인들의 승리를 기념하는 절기에 토론하기 좋은 곳에서 거닐고 계셨다는 사실이

마치 자신을 찾아올 무리들을 기다리고 계셨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아니나 다를까,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아옵니다.

그들이 예수를 에워쌌다고 성경은 표현합니다.

보통 다수가 한 사람을 에워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지금 일촉즉발의 상황인 거죠.

그래서인지 한 관주성경은 22절의 나타난 겨울이라는 계절 표현을 예수와 유대인들의 차가운 적대 관계를 나타낸 것이라고도 말합니다.[5]

그들이 예수를 둘러싸고 무슨 말을 했습니까?

24절을 같이 읽어볼까요?

새번역 성경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의 마음을 졸이게 하시렵니까? 당신이 그리스도이면 그렇다고 분명하게 말하여 주십시오”

아마 본문 위 19-21절 말씀처럼 서로 간에 어지간히 분쟁이 있었나 봅니다.

도저히 답이 안 나오니까 찾아와 이야기하는 거예요.

‘대체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이 그리스도, 메시아 입니까?’

하지만 이 질문에는 위험 요소가 다분히 들어있습니다.

개역개정에는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라고 번역했는데 영어성경은 번역에 따라 ‘알아듣기 쉽게’ (plainly) 혹은 ‘공론화해서’ (publically) 말씀하십시오 라고 표현했습니다.

만약 예수께서 자신이 약속대로 오신 메시아요 그리스도이심을 모든 사람이 알아듣기 쉽게 대놓고 이야기했다면

모든 사람이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순종하며 믿었을까요?

오히려 진작에 돌에 맞아 돌아가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씀하지 않아도 예수께서는 이미 자신이 누구인지 수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25절을 함께 읽어볼까요?

무엇이 문제입니까?

아무리 말하고 보여줘도 믿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때 예수께서 조금 심각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26절)

이것은 요한복음 8:45-47절과 연결됩니다.

같이 읽어보시죠.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그러나 예수께서 내 양이 아니다 혹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다 함은 그들에게 저주를 내리셨다기보다 그들의 상태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이제라도 돌아오라는 회복의 명령입니다.

10:38에 보시면,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 라고 하시면서 돌아올 여지를 보여주고 계시는 것이 그 근거입니다.

그럼 예수의 양들은 어떻습니까?

27절을 함께 읽어보시겠습니다.

잠시 이 모습을 상상해 보시지요.

평화로운 초원에서 가만히 풀을 뜯고 있던 순박한 양들이 목자가 인자한 목소리로 부를 때 뒤도 안 돌아보고 목자를 향해 가는 그 모습 말입니다.

참 사랑스러운 모습 아닙니까?

그들은 서로를 잘 알고 있으며 서로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목자를 믿고 따르는 양에게 주어지는 선물이 있습니다.

28절을 보시면 무엇을 준다고 말씀합니까?

영생을 준다고 말씀합니다.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목자의 손에서 이 양들을 누구도 빼앗아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참 든든합니다.

세상의 어떤 지도자는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이 자기 맘에 안 든다고 버리기도 하고 지위와 명예를 빼앗기도 합니다만,

이 선한 목자는 영원히 자신의 양들을 지키실 것이라 말씀합니다.

그럼 이 선한 목자는 무슨 힘이 있어 양들을 지킬 수 있습니까?

17:2-3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개역개정)

여기에서 안다는 말은 지식으로 아는 것을 넘어서 깊은 사귐과 교제가 있는 관계를 말합니다.

바로 이겁니다.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깊이 관계 맺는 것이 곧 영생인데 이 영생을 주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에게 놀라운 권세를 주셨다는 겁니다.

만민을 다스리는 그 권세 말입니다.

이 권세는 얼마나 놀라운지 빌립보서 2:10-11 말씀처럼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이 모두 예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든 입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이 정도 권세면 자신의 양을 절대 빼앗기지 않겠다는 말씀이 설득력 있게 들리지요?

그런데 이어지는 오늘의 본문은 이 권세를 보다 강력하게 말해줍니다.

29-30절을 읽어보시겠습니까?

양들에게 영생을 주시려고 아버지께서 권세를 주신 것인데

이제 아예 그 아버지와 예수가 한 분이라는 겁니다.

즉, 예수께서도 역시 만물보다 크시며 그러기에 예수에게서도 그 양들을 빼앗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를 아는 것이 곧 영생입니다.

여기에 기독교의 놀라운 진리가 숨어 있습니다.

세 인격이지만 한 분이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동일하게 원하시는 것은

바로 한 영혼 한 영혼을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빼앗기지도, 멸망 당하기도 원치 않으신다는 사실 말입니다.

너무 사랑한 나머지 성부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성자 예수는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다시 부활하셨어도 몸에는 사랑의 흔적으로 손과 발의 못 자국과 옆구리의 창 자국을 갖고 있습니다.[6]

그리고 성령께서 지금 우리에게 그 놀라운 사랑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롬 8:16, 개역개정)

이 삼위 하나님의 사랑에서 그 누구도 우리를 끊어낼 수 없습니다.

환난이나 곤고, 박해가 문제겠습니까?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 문제겠습니까?

심지어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 덤벼온다 해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 8:35-39, 개역개정)

그 선한 목자의 품에서 우리를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를 따르는 우리를 또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시는 위대한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그 어떤 고통도, 아니 죽음마저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품에서 빼앗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멀리서 지켜보시는 분이 아니라 자신의 양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리는 참 목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유대인들은 그토록 많은 기적을 보아왔음에도

예수라는 한 사람을 믿을 만한 사람인가 아닌가 시험하였습니다.

자신들의 승전기념일에 성전에서 말이죠.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런 세상의 시험에 상관없이 영생을 주시는 목자이십니다.

양들을 사랑하시되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목자이십니다.

양들이 고통 당하고 괴로울 때에 도망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목숨을 내어주는 목자이십니다.

그 분이 우리 하나님이시요 주님이십니다.

임마누엘 주님 영광 받으소서!

[1] “We now come to the climax of Jesus' public ministry.”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https://www.biblegateway.com/passage/?search=John+10&version=NIV

[2] http://almostdrshin.tumblr.com/post/86375166107/

[3] John T. Swann, “Feasts and Festivals of Israel,” ed. John D. Barry et al., The Lexham Bible Dictionary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12, 2013, 2014, 2015); http://www.pckworld.com/news/articleView.html?idxno=1530

[4] George Raymond Beasley-Murray, John, Word Biblical Themes (Dallas: Word Pub., 1989), 173.

[5] 성경전서(관주 해설)(Nkgo88ti)(색인)(개역개정판) (대한성서공회, 2009), 163.

[6] 김요한 목사의 페이스북 내용 중 일부 표현 참조. https://www.facebook.com/profile.php?id=100002512424962

댓글 0개
Featured Posts
잠시 후 다시 확인해주세요.
게시물이 게시되면 여기에 표시됩니다.
Recent Posts
Archive
Search By Tags
Follow Us
  • Facebook Basic Square
  • Twitter Basic Square
  • Google+ Basic Square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