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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16 불가능한, 그러나 이루어 갈 - 요 13:31-35

지난 주에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선한 목자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이번 주는 그 사랑을 우리 안에서 어떻게 풀어나가고 적용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 보고자 합니다.

지난 주에 함께 나눴던 대로, 선한 목자이신 예수께서는 자기 양 떼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고 그 고통의 흔적을 지닌 채 부활하셔서 지금 우리의 고통의 현장에 함께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저 그 사랑에 감사하는 것이 우리 신앙의 전부일까요?

본문 바로 앞의 상황을 보면 때는 잡히시던 날 밤 유월절 만찬,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주기로 한 것이 확실해지고 그렇게 그는 그 만찬 자리를 떠납니다.

그렇게 유다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본인이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그로 인해 영광을 받으셨다고 선포하십니다.

17:1를 보면 조금 더 쉽게 이해가 되는데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주께서는 가룟 유다가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자신을 넘겨주려 떠난 그 순간이 자신의 체포가 코 앞에 다다른 순간임을 아셨고, 자신의 십자가 처형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이루어짐은 물론 자신과 그 분이 영광 받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작은 자들아 / little children”

제자들을 안타까이 여기며 사랑스럽게 부르시는 호칭입니다.

‘너희가 나를 찾아도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어’ 라고 말씀하시죠?

이는 곧 ‘나 십자가에 죽으러 갈 거야’ 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서로 사랑하라’ 입니다.

“너희가 사랑하면 사람들이 너희를 내 제자로 알리라”

일종의 유언과 같은 말씀인데요,

자신의 마지막이 다가옴을 직감하면서 주신 말씀이 어떤 위대하고 광대한 명령이 아닌

‘서로 사랑하라’ 였습니다.

조금 시시해 보이나요?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다른 것으로는 대체될 수 없는 가장 강력한 명령입니다.

그리고 이 강력한 명령은 제자들을 넘어서 지금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명령을 따라 우리는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우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이라는 예수의 표현에 귀 기울였으면 합니다.

예수의 이 말씀이 우리에게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와

동시에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그 마음가짐을 일러줍니다.

첫째,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는 말 그대로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고 또 지금도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은 우리가 서로를 사랑해야 할 가장 큰 그리고 중요한 이유가 됩니다.

쉽게 말해, 우리를 향한 예수의 사랑은 우리가 왜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지 이유를 말해줍니다.

세상 친구들 다 날 버려도 예수 밖에 없다, 예수 사랑이면 족하다는 말이

그냥 흥얼거리는 찬양 가사의 한 구절이 아니라

내 삶의 한 부분이 되었을 때

예수께서 사랑하신 사람들을 우리 또한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 분의 사랑이 우리를 사랑하게 만듭니다.

예수께서 값도 없이,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을 부어주셨는데 나는 다른 사람을 값없이 사랑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는 말은 그의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사랑하도록 강권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고후 5:13-19)

13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14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16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7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18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예수의 사랑이 어떤 사랑입니까?

단 한 번의 죽음으로 온 인류를 구원한 놀라운 사랑입니다.

그 놀라운 사랑을 가능케 하신 그의 죽음은 우리를 어떻게 한다고 합니까?

15절 말씀대로 다시는 우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우리를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해 살게 한다고 합니다.

내 것, 내 건강, 내 돈, 내 명예, 내 자식, 내 지식, 내 친구들 자랑하며 나만 위해 살던 삶에서

나를 위해 죽으신 그 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삶으로 바꿔주신 것이 바로

그의 십자가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분명하게 선포되는 것이 17절 말씀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

즉, 나를 위한 이전의 욕심은 다 지나가고

예수를 위한 새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위해 사는 삶이 무엇이라고 이어서 말씀합니까?

18절 말씀대로 화목하게 하는 삶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태어나면 우리는 다시 그 사랑을 가지고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도록,

다시 말해 사랑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도록 돕는 직분을 맡게 되었다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를 알면 알수록

예수를 사랑하려고 애 쓰면 쓸수록

그 사랑은 우리를 더욱 강권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도록 강권합니다.

다른 이들을 긍휼히 여기도록 우리를 강권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할 수 있게 힘쓰라고 우리를 강권합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죄 중에 살던 사람을 돌이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것만큼 그 사람을 사랑하는 길이 또 있을까요?

더불어,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교회임을 믿고

또한 우리가 모여 교회가 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는 곧 우리가 사랑해야 한다는 이유가 됩니다.

에베소서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1:22) 이시고 교회는 사랑 안에서 세워져 가는 존재입니다 (4:16).

다시 말해, 예수께서 교회의 머리이심을 인정하고 믿는다면

우리는 그 교회의 지체로써 머리이신 예수를 따라 사랑으로 교회를 세워가야 하는 분명한 목적을 지니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성령의 은사들을 이야기하다가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하면서 13장에서 사랑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교회의 각 지체인 우리가 사모해야 할 가장 큰 은사는 바로 사랑입니다.

방언하는 것이 성령충만이라고요?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소위 불이 떨어지는 설교를 한다고 그것이 성령충만의 전부이겠습니까?

성령 충만은 사랑 충만이에요.

예수와 성령은 한 분이신데,

예수께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 원하신다면 성령께서도 가장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사랑입니다.

우리의, 교회로서의 존재 이유는 바로 사랑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임을 증명하려면 이 사랑을 더욱 사모하고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죠.

자, 그러면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요?

아까 말씀 드린 대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는 주의 말씀은 우리가 서로를 사랑해야 하는 구체적인 마음가짐을 제시해 줍니다.

다른 예를 생각하기 보다 본문 앞에 있었던 이야기를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어떤 일이 있었나 하면,

예수께서 손수 제자들의 발을 닦으셨습니다 (요 13:1-11).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닦으실 때 마음가짐은 1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그런데 그 다음에 바로 나오는 말씀이 “마귀가 벌써…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2절).

예수께서 유다의 이 마음을 모르셨을까요?

다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대야에 물을 떠서 그 발을 닦으셨어요.

그 마음은 어땠을까요?

그 사랑의 정도가 상상이 되시나요?

우리가 주님처럼 사랑한다고 할 때 우리를 죽이려는 사람마저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감히 말씀 드립니다.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 압니다.

우리가 예수가 아니기에 절대적으로 불가능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감히 이 자리에서 이렇게 말씀 드리는 것은

우리가 끝내 따라야 할 예수의 사랑이 바로 그런 사랑이기에 그렇습니다.

더불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의 사랑은 자신이 먼저 죽는 사랑이었습니다.

한 관주 해설에 따르면 다른 이의 발을 닦는 것은 노예의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평소에 주님 혹은 선생이라 불리던 자가 노예의 일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스스로의 자존심을 완전히 죽인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게 제자들 앞에서 스스로를 낮추신 주께서는

십자가에서 자신을 죽이심으로써 사랑의 완성을 이루셨습니다.

저는 사랑이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내가 죽지 못하니까 사랑하기 어려워요.

때론 죽기보다 싫은 것이 자존심 내려놓는 일 아닙니까?

한 공동체 안에 있어도 내가 조금 더 드러나야 하고 내가 조금 더 인정 받아야 하니까 다른 사람이 나보다 잘하거나 칭찬받으면 미워지고 꼴 보기 싫어지고 …

그래서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않는다 (고전 13:4) 말씀하나 봅니다.

어떻게 사랑하냐고 물으신다면,

내 자존심을 죽임으로써 사랑할 수 있다고 우리는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내 자존심도 내려놓은 채로 서로 사랑한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요?

사람들이 우리를 주의 제자로 바라보게 됩니다.

이 말은 곧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을 지키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 또한 예수의 가르침을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28:18-20절의 지상명령이 그대로 이뤄지는 거예요.

그런데요,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왜 새 계명일까요?

구약 전반에서도 이웃 사랑에 대한 말씀은 계속 나타나는데 말이죠 (특히, 레 19:18).

이것은 곧 우리가 지금까지 계속 이야기했던,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라는 말 때문입니다.

즉, 예수께서 보여주신 그 사랑만큼 우리가 또 사랑해야 한다는 “새로운 척도”가 생겼기에 그렇습니다.[1]

그리고 느끼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예수께서 서로 사랑하라 하신 말씀은 제자들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나가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해라 하시기 전에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왜 먼저이냐고 물으신다면

감히

한국 교회의 속내를 먼저 들여다 보시라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소위 성공했다고 하는 교회들의 내면을 자세히 들여다 보시라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고 옥한흠 목사님의 절규가 떠오릅니다.

“믿음이 좋기로 소문난 사랑의 교회에 복음[사랑]이 얼마나 필요한가!”[2]

그렇다고 작은 교회들은 사랑이 넘쳐나나요?

말로는 가족 같은 교회라 하지만 서로의 다툼으로 인해 가장 공중분해 되기 쉬운 것이 바로 작은 교회들 아닙니까?

30명이든 50명이든 말이죠.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서 어찌 교회 밖의 사람을 사랑하겠다고 나선단 말입니까?

요즘 사회가 교회를 걱정하지 않습니까?

너희나 잘 하라고!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말씀하셨던 주님의 말씀이 이렇게 무색해질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제가 여러분을 사랑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이제부터라도 사랑하겠습니다.

여러분도 저와 함께,

주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의 발자취를 함께 따라가지 않으시겠습니까?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갈 5:13-14, 개역개정)

[1] 성경전서(관주 해설)(Nkgo88ti)(색인)(개역개정판) (대한성서공회, 2009), 신약 228.

[2] https://www.youtube.com/watch?v=W3OC9q7iae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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