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0816 겁쟁이들이 큰 기쁨의 증인이 되기까지 눅 24:44-53
우리가 부활절을 기점으로 해서 지금까지 나눴던 말씀들을 생각해보면,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모습들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고난을 예고하실 때 제자들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두려워하고 근심하고 걱정했어요.
예수께서 유대지도자들에게 잡히시고 결국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실 때 제자들은 어땠습니까?
두려워하여 배반하고 부인하고 도망갔습니다.
그럼 예수께서 부활하셨을 때는 어땠나요?
예수의 빈 무덤을 보고 마리아의 생생한 증언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두려워하며 문을 걸어 닫고 있었어요.
읽지는 않았습니다만 오늘 본문 앞에 나타난 사건도 그렇습니다.
예수의 죽음에 실망한 제자 두 명이 엠마오라는 곳으로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납니다.
처음에는 예수신지 모르고 얘기를 나누는데 나중에 정신차려보니까 예수이신 걸 알았어요.
헐레벌떡 열한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자신들이 예수를 만났다고 전하는데 마침 그 곳에 예수께서 나타나신 거예요.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놀라고 무서워하고 두려워하고 의심합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까지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에 대해
복음서에 나타난 제자들의 대표적이고 일관적인 반응은 두려움이었습니다.
지난 주 말씀처럼 성령께서 오셔서 깨닫게 하신다, 너희에게 평안을 준다 하셔도 그들 마음에는 두려움이 가득했어요.
물론 지금 제자들을 비난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들의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었던 제자들의 두려움, 그 연약함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들을 정죄하기 보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그들의 변화에 주목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들의 변화를 살펴보기 위해 오늘 본문의 마지막 부분인 52-53절 말씀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여기에서 ‘그들’은 제자들을 말합니다.
제자들의 마음에 두려움이나 걱정이 있다고 말하나요?
오히려 ‘큰 기쁨’이 제자들에게 있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제가 이 ‘큰 기쁨’ 이라는 단어에 주목하게 된 것은 이 단어가 누가복음에서 딱 두 번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인가 중요한 곳에 의도성을 가지고 쓰였다고 보았습니다.
이 두 곳 중의 한 곳은 오늘 본문인 24:52 이고요
χαρᾶς (charas)- joy / Μεγάλης (Megalēs)- great[1]
그리고 다른 한 곳은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예수의 탄생을 알리는 장면인 누가복음 2:10입니다. 같이 읽어보실까요?
χαρὰν (charan)- joy / Μεγάλην (megalēn)- of great[2]
즉, 아기 예수가 이 땅에 태어나실 때 온 세상에 선포되었던 그 큰 기쁨이 예수의 제자들에게 동일하게 있다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걱정으로 연약하기 그지없던 제자들의 마음이 도대체 왜 이렇게 기쁨 가득한 마음으로 변할 수 있었을까요?
더군다나 오늘 본문 읽으신 대로 자신들의 스승이던 예수께서 이제 아예 자기들 옆에서 떠나는 대도 말이죠.
다시 한 번 두 말씀을 비교해 보자면요,
누가복음 2:10에서 천사들이 전한 소식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었어요.
그 좋은 소식은 다윗의 동네에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약속된 말씀대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 좋은 소식(good news)이었고 이것이 큰 기쁨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좋은 소식의 주인공이신 예수께서는 갈릴리와 유대, 사마리아 지역까지 다니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좋은 소식, 즉 복음을 선포하셨어요.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완성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제자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온 세상에 전하라고 부탁하면서 떠나는 장면이 오늘 본문입니다.
천사들이 목동들에게 와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노라’, 즉 ‘예수의 탄생을 전하노라’ 라고 했다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복음인 나를 전하거라’ 말씀하셨고
그 동일한 기쁨이 제자들에게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럼 다시 아까 드린 질문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떻게 제자들은 두려움과 걱정으로 일관된 마음에서 큰 기쁨을 누리는 마음으로 변화할 수 있었을까요?
제자들이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닌 큰 기쁨을 갖게 된 주 요인은 45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같이 읽어보실까요?
44절 말씀대로 예수께서 구약성경 전체가 자신에 대해 예언하였고 그대로 이루어졌음을 깨닫게 하시니까
제자들은 알게 된 거예요.
자신들이 함께 먹고 마시던 것처럼 예수를 살과 살로 대할 수는 없지만
약속한 바대로 이루셨던 주께서
스스로의 약속처럼 자신들과 영원히 함께 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겁니다.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예수를 통해 보았고
그 예수는 약속된 대로 이 땅에 오셔서 말씀대로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말씀대로 다시 살아나셨고 말씀대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당연히, 그 분은 말씀대로 다시 오신다는 것을 제자들은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들이 믿어지면서 제자들은 자신들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깨닫습니다.
즉, 정체성을 확고히 합니다.
오늘 본문 46-47절을 보시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시는 가운데 예수께서 자신의 고난과 부활을 다시 한 번 말씀하시고
자신의 이름으로 죄 사함의 회개가 온 족속에게 전파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48절에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 즉 예수의 이름을 통한 구원이 모든 족속에게 전파된다고 하는 것이 보통 일입니까?
예수 본인도 이스라엘을 떠나본 적이 없는데 그의 이름을 통해 모든 족속이 구원받는다 하니
그 당시 제자들의 생각으로는 이해가 안 될 법도 하잖아요.
그럼에도 주께서는 온 족속에게 자신이 증거될 것인데 너희가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누구인지, 이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알려주신 것이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 그리고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를 전파하는 증인임은 분명하지만
그들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했더라도 그것만으로 큰 기쁨이 있었을까요?
오히려 자신들의 책임에 대해 더 큰 부담이 느껴지지는 않았을까요?
우리가 전도나 선교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 혹은 부담을 갖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기에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다음 말씀입니다.
49절을 같이 읽어보실까요?
증인이 되기 위해 필요한 능력은 우리의 능력이나 힘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약속해서 보내주시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능력입니다.
즉, 성령이 우리에게 입혀질 때 이것이 우리를 증인이 되게 합니다.
우리가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진다는 것은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되”는 (사 32:15) 역사가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또한 목마른 자가 물을 마시며 메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는 것과 같은 역사이며(사 44:3)
그 능력이 입혀질 때 우리에게 새 마음이 생기며 육신의 굳은 마음대신 부드러운 마음이 생기며 주의 율례와 규례를 지키게 됩니다 (겔 36:26-27).
우리가 지난 주에 보았던 말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라는 예수의 말씀이 바로 지금 말씀과 같이 우리 속에 계시는 새 영, 주의 영을 통하여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 약속의 말씀들이 다 깨달아지니까 마음과 태도가 완전히 달라진 거에요.
이전에 보았던 말씀들을 생각해 보면,
예수께서 내가 갈 곳에 너희는 못 온다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어디 가냐, 그 길을 대체 뭐냐, 나도 가겠다 등등 떼를 썼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49절 끝에서 ‘이 성에 머물라’는 예수의 말씀을 듣고
그들이 52-53절처럼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에 머뭅니다.
그것도 불평불만이나 두려움이 아닌 하나님을 찬송함으로 말이죠.
이 모든 변화가 어디에서 왔다고요?
예수께서 마음을 열어 말씀을 깨닫게 하신 것에서부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말씀을 깨달았다는 것은 곧
예수가 누구이신지 정확히 알게 되었다는 것이고
예수가 왜 고난 받으셨고 살아나셨는지 알게 되었다는 것이고
오셨던 예수께서 다시 올라가시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고
그가 다시 오시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고
예수의 이 모든 것이 약속으로 주셨던 말씀대로 였음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고
그 약속대로 자신들이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져서, 즉 성령을 힘 입어서 예수의 이 모든 일을 증언하는 증인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연구한 몇몇 주석들과 주해에 의하면
47절 말씀처럼 온 족속이 예수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는 회개에 이를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구원사역이 완성된다고 설명합니다.[3]
그 구원 사역은 태초부터 있었던 주의 계획 안에 있었고
끝내 이를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일을 이루기 위해 여전히 주께서는 우리를 부르시며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여러분이 이 모든 일의 증인임을 믿으십니까?
혹시 내가 아직 그리스도의 증인이라는 것이 부끄럽거나 부담스러우십니까?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실제 일어났던 일이고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부끄럽고 부담스러우십니까?
예수의 말씀을 듣기는 들어도 무든 말인지 잘 이해가 안되니까,
그래서 부담스러우니까 차라리 증인 같은 거 안하고 관두시렵니까?
그저 교회 잘 다니는 것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여전히 불안과 두려움과 걱정에 사로잡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전쟁에서도 최고의 방어는 공격이라 말하고
사업에서도 위험을 감수하고 투자하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우리 인생과 우리 신앙에도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주 앞에 더 칭찬받기 위해 애쓰는 공격적인 모습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아니, 우린 이미 예수의 말씀대로 그의 증인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열어 말씀을 깨닫게 해달라고 간구하고
성령으로 옷 입혀 달라고 간구하십시오.
이렇게 주의 말씀을 깨닫고 주의 영으로 충만하여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큰 기쁨으로 감당하시는 여러분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1]W. Hall Harris III, The Lexham Greek-English Interlinear New Testament: SBL Edition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10), Lk 24:52.
[2]W. Hall Harris III, The Lexham Greek-English Interlinear New Testament: SBL Edition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10), Lk 2:10.
[3] 성경전서(관주 해설)(Nkgo88ti)(색인)(개역개정판) (대한성서공회,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