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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616 누구와 어디로? – 눅 9:51-62


지난 주에 군에 입대하는 제 사촌 동생을 만났습니다.

마치 제가 부모님 집에 있을 때 입대 전 인사를 하겠다고 온 겁니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그 녀석이 제게 묻습니다.

“형, 제가 선교사로 나가야 하는지 궁금해요”

이제 군대에 들어가는 것도 깜깜한데 선교라..

차라리 하나님의 강력한 인도하심이 있었다면 많이 고민하지 않았겠지만 딱히 그렇지도 않았던 모양입니다.

군대에서 더 깊은 고민을 해보고자 한다면서 덧붙이는 말이,

하나님이 원하시면 그 길을 가겠다고 서원 아닌 서원을 했다고 해요.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그게 더 무서운 기도라고..

제 사촌 동생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한편으로는 그가 이미 자신 안에 답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선교사가 되겠다는 기도도 선교사를 하고 싶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고요.

다만, 때를 기다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다 굳은 결심을 할 그 때를 말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언제 그리고 어디로 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은 언제나 쉽지 않은 일입니다.

때론 두려운 일이기도 하고요.

물론 이 일은 제 사촌동생처럼 20살 젊은 청년만의 일이 아닌 우리 모두가 계속 고민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고민이 오늘 본문에서도 사뭇 여러 번 등장합니다.

먼저 예수님을 보시죠.

본문 첫 절(51)에서 승천하실 날이 다가와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다고 합니다.

곧, 예루살렘에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다시 하나님 우편으로 올라가실 때가 가까웠음을 이야기하는데요,

본문 앞에 22절과 31절을 잠시 보실까요?

그러니까 기약이 차 간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시간이 가까워 오고 있다는 말이겠지요.

그런데 51절의 표현 중 눈 여겨 보게 되는 것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갈 것을 굳게 결심하셨다는 표현입니다.

원어에서는 ‘얼굴을 예루살렘으로 향하다’ 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어디론가 얼굴을 향한다는 표현은 무엇을 하기로 한 흔들리지 않는 굳은 확신을 말하는 관용적 표현이라고 합니다.

창세기에서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을 떠나 아버지 집으로 향할 때 얼굴을 향하여 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1]

그 결정을 하기까지 결코 쉽지 않았지만 반드시 그렇게 하겠다는 굳은 의지의 표현인 셈입니다.

우리 주님이 이렇게 십자가를 지기 위해 굳게 결심하시기까지 참 많은 고민이 있었음을 이 한 구절에서도 우리는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주님은 일어나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굳은 결심을 누구나 다 호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사마리아 지방을 지났어야 하는데요,

이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의 예루살렘 행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과 적대적 관계에 있었기에 그들의 반응이 어느 정도는 이해됩니다만

문제는 제자들의 반응이었어요.

당장 하늘로부터 불을 명하여 저들을 멸할까요 라고 묻습니다.

성격 한 번 화끈합니다.

실제로 열왕기하 1장에 보면 이스라엘 왕 아하시야가 크게 다쳐 죽게 되었는데 자기가 나을 수 있을까를 이방신한테 물어보다가 하나님께 딱 들켰어요.

그래서 부랴부랴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에게 부하들을 보냈는데 엘리야가 말하길,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너와 네 부하 쉰 명을 모두 태울 것이다.” (왕하 1:10)

그리고 진짜 불이 내려와 아하시야의 부하들을 모두 태워 죽였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아마 그 장면을 생각했나 봅니다.

‘감히 큰 일 하러 가시는 우리 선생님을 반기지는 못할 망정 환영하지도 않다니 괘씸합니다. 다 불태워 죽여버리겠습니다’

라고 격양되었던 것이죠.

하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제자들을 꾸짖으십니다.

어떤 성경 사본에는 꾸짖으신 내용이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내용인즉슨,

“이르시되 너희는 무슨 정신으로 말하는지 모르는구나 인자는 사람의 생명을 멸망시키러 온 것이 아니요 구원하러 왔노라 하시고”(관주해설성경, 눅 9:55).

제자들이 십자가를 향한 예수님의 굳은 결심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그렇게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갑니다.

그렇게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말합니다.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57절).

참 멋있습니다.

주께서 칭찬하고 함께 가자 하실 법한데 58절 말씀을 보면 마치 초를 치는 것 같습니다.

58절 같이 읽어보실까요?

왜 이 말씀이 주를 따르겠다고 하는 자에게 초를 치는 것 같으냐면,

너는 과연 나와 같은 박대를 받을 준비가 되어있느냐 물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2]

‘나도 머리 둘 곳 하나 없는데 (아마 사마리아에서의 박대를 말하는 듯 합니다) 너라고 별 수 있겠느냐’ 하시는 거죠.

‘내가 이렇게 거절당하듯이 나를 따르면 너도 거절 당할 거야’ 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번엔 예수께서 다른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59절)

그런데 그 사람이 말합니다.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자료를 찾아보니까요, 당시 장례 풍습이 조금 독특하더라고요.

지난 번에 말씀드린 바 있듯이,

시체는 죽은 그 날 바로 매장합니다.

그런데 시신을 안치한 후 1년 뒤에 뼈를 추려서 유골함에 넣는 2차 장례 문화가 있었다고 합니다.[3]

그러니까 나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해 달라는 말은 1년의 시간을 달라는 말입니다.

마치 부름에 응답하지 않겠다는 말로 들리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60절 말씀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이후에 또 다른 사람이 말합니다.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예수께서는 그에게 가족 때문에 예수 따르기를 주저하면 마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 같다고 강력하게 말씀하십니다.

조금 지나칠 정도로 매정하게 들리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한 성경 해설을 보니까요 가족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자 하는 소원 속에는 벌써 과거의 것을 돌아보려는 욕구가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더라고요 (관주 해설성경, 눅 9:61).

과거의 것을 돌아보기에는 예수의 복음 전파가 너무 시급한 거에요.

이미 때가 차서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계신 것 아닙니까?

빨리 복음을 전하러 가야 하는데 작별 인사하느라고 뒤쳐져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여러분께서 기도해주셔서 지난 주 강진제일교회 사역을 은혜 가운데 잘 마쳤습니다만,

사실 그곳에 가기까지 계속 고민했던 것은 여기 있는 가족들을 걱정하는 마음에서였거든요.

그런데 지나고 보니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게 하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자리를 비움으로써 온 가족이 한 번씩 더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강진제일교회 담임목사님에게 치료와 쉼을 허락하시는 동시에

부족한 저를 통해 그곳에서 끊임없이 복음이 선포되게 하셨고

그곳에서 말씀을 전하는 중에 오히려 우리 한마음교회와 성도님들을 위해 더 뜨겁게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만약 가족을 걱정하는 마음이 너무 지나쳐서 그 사역의 현장을 외면했다면 크게 후회했을지도 모른다는 아찔한 생각을 했습니다.

그곳에서의 사역은 우리 모두의 승리라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살펴 본 오늘 본문은 아까 말씀 드린 바와 같이 고민에서 시작해서 고민으로 끝이 납니다.

물론 이 고민은 ‘답.정.너’ 입니다.

답은 정해져 있으니까 너는 대답만 해.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나는 지금 너를 대신해 십자가를 지려고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어.

나는 고민 끝에 그렇게 굳게 결심했어

왜냐하면 그것이 내가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온 이유이고

내 아버지 하나님께서 끝내 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이야.

너는 어떻게 할래?’

‘사람들이 너를 외면할 것이고

문전박대하고 핍박할 거야

그래도 너 나 따를래?’

‘죽은 아버지를 관습대로 장사 지낼 시간이 없어.

남은 가족들한테 작별인사하면서 마지막 따뜻한 밥 한끼 나눌 시간도 없어.

뒤를 돌아볼 시간이 없어.

어서 나를 따라오지 않을래?’

예수께서는 철저한 외면과 핍박과 죽음의 장소인 예루살렘으로 얼굴을 향하여 가고 계시면서 묻고 계시는 거에요.

“너의 얼굴은 어디를 향하고 있니?”

네 육체의 즐거움이니?

네 지식의 만족함이니?

네 손에서 느껴지는 짜릿한 돈맛이니?

네 과거에 대한 미련이니?

네 얼굴은 어디를 향하고 있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감히 바라고 원하기는

여러분 마음에 우리 주님을 따르기로 굳게 결심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그렇게 결심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네 주님!

나의 얼굴을

우리의 얼굴을 주님께로 향하겠습니다.

주의 복음으로 우리의 얼굴을 향하고 이 복음 전파하기로 굳게 결심하겠습니다

우리가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여 생활하며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며

무슨 일에든지 대적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어린 양 예수를 따라가기로

우리도 결심하겠습니다

외칠 수 있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주께로 얼굴을 향할 때

알파요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길이 되시며 생명이 되시며 영원한 즐거움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1] Biblical Studies Press, The NET Bible First Edition Notes (Biblical Studies Press, 2006), Lk 9:50–51.

[2] Jesus’ reply is simply this: Does the man understand the rejection he will be facing? Jesus has no home in the world (the Son of Man has no place to lay his head). Biblical Studies Press, Lk 9:58.

[3] Biblical Studies Press, Lk 9:60: segibak.or.kr/?document_srl=135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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