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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316 영적 추수의 기쁨 – 눅 10:1-11, 16-20


오늘은 맥추감사주일 입니다.

올 한해 첫 수확(보리) 감사하는 절기인데요, 맥추절(출23:16)을 한국 상황에 맞춰 적용한 것입니다.

추수할 때를 생각해 보면, 물론 열매가 풍성한 것도 좋지만

정작 좋은 것은 그 열매를 수확하는 사람 아니겠습니까?

오늘 말씀도 우리에게 진정한 추수의 기쁨이 무엇인지 일러주고 있습니다.

지난 주 말씀, 누가복음 9:51-62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자신이 이 세상에서 떠날 날이 가까워 오심을 알고 제자들과 급하게 발걸음을 옮기시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만나는 이들에게 자신을 따를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함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자고 부르셨습니다.

오늘 본문 처음이 “그 후에” 라고 시작하고 있지요?

그러니까 그렇게 불러 모으신 이들을 이제 주께서 복음 전파자로 세우시는 장면이 오늘 본문의 1절 말씀입니다.

비슷한 말씀이 기록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보내시는 것으로 나옵니다.

누가복음에서도 본문 앞 9:1-6을 보시면 이미 열두 제자를 보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독특하게도 “따로” 70인을 세우셨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열두 제자와는 구별된 70명의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조금 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지난 주 말씀, 즉 9:57-62에 등장하는, 따로 부르신 사람들을 다시 보내신다는 것으로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70명이었을까요?

성경학자들에 의하면, 이것이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민족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숫자라고 합니다.[1]

창세기 10장에 보면(잠깐 볼까요?) 큰 홍수로 노아의 가족을 제외한 모든 인류가 멸망한 뒤에,

다시 노아로부터 번창한 후손들, 즉 각 지역의 민족들 이름이 나열되는데요,

그 총 민족의 수가 70 입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70명을 세워서 자신이 친히 가시려는 동네와 지역에 보내신 것은 온 세계에 복음이 전해질 것이라는 의도와 상징이 담겨있다는 것입니다.

곧 그렇게 땅 끝까지 주의 복음이 전해질 줄 믿습니다.

이 1절 말씀에서 또한 관심을 끄는 것은,

주께서 그 70명을 보내실 때 따로 따로 보내시지 않고 둘씩 짝지어 보내셨다는 사실입니다.

한 명씩 보내면 이동 속도도 훨씬 빨라서 더 멀리 갈 수 있었을 것이고

70 군데를 다닐 수 있을 테니 더 많은 지역으로 갈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아마도 주께서 우리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아시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아무리 영광스러운 복음을 들었다 한들 이를 모르는 사람들은 핍박하고 손가락질할 텐데

혼자라면 금방 좌절하고 포기하게 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둘이라면 더 힘을 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실 지난 주 제가 참석했던 세미나에서 참 많이 강조된 것이

목회자와 사모가 동역자가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가뜩이나 개척교회, 작은교회가 사람도 없는데

부부마저 서로 이해하거나 돕지 못하고 토닥거리면 사명을 어떻게 감당하겠냐는 거에요.

아니, 사명은 둘째치고 성도들이 그 모습보고 은혜를 받겠냐고 하시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보니 참 귀하더라고요.

이 개척의 과정을 함께 걸어가는 제 아내가 참 고맙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앉아계시는 여러분이 참 귀하고 고맙습니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잘 알고 지내는 사이라고 해도 이 작은 교회에서의 복음 사역을 함께 감당한다는 일은 그렇게 녹녹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둘씩 짝지어 보내셨듯,

제가 여러분 옆에, 여러분께서 제 옆에 함께 있어 교회를 함께 세워갈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 모릅니다.

이렇게 동역자로 묶어주신 주께 우리가 간구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2절 말씀입니다.

같이 읽어보실까요?

추수할 것이 많답니다.

여러분, 추수할 때가 되었는데 추수하지 않으면 그 농작물이 상하지 않겠습니까?

과실은 다 땅에 떨어져 상하게 되고요

벼는 무거워서 쓰러져 상하게 될 거고요

뿌리 작물들은 땅 속에서 그냥 썩어 버리게 될 겁니다.

그런데 간혹 농작물 수확을 포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추수하고 싶어도 인건비가 더 든다는 거에요.

농부 입장에서는 얼마나 마음이 급할까요?

2절은 그런 의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가까웠는데,

추수할 때가 가까웠는데

일꾼이 없다는 거에요.

급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급하게 일꾼을 부르시는 와중에도 우리 주님은 추수하러 보내시는 자들을 걱정하십니다.

3절 보시면 어린 양을 이리로 보내는 것 같다고 하세요.

늑대에게 어린 양이 가면 어떻게 됩니까?

그런 복음을 전하는 자리가 그렇게 죽음의 현장처럼 무서운 핍박으로 다가올 때가 있어요.

그럼에도 주께서는 보내십니다.

왜요?

천하보다 귀한 영혼이 단 하나라도 구원받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영혼이 주께서 다스리시는 그 하나님의 나라에 어서 동참할 수 있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4-11절에 보시면 예수께서 어떻게 복음을 전할 것인지 말씀해 주십니다.

4절 돈 주머니도 쓸데없는 짐도 신발조차도 가지지 말고 길에서 잡담하느라 시간도 낭비하지 말아라 – 급박함

5절 아무 집에든지 가서 하나님의 평강을 빌어줄 때

6절 평안을 받을 사람, 즉 예비하신 영혼이라면 평안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7절 그리고 그 집에서 거하면서 그 집에서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애당초 전대나 배낭이 필요 없던 것이죠.

그리고 이 집 저 집 옮겨다니지 말고 그 집에 온전히 집중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8-11절도 비슷합니다.

영접하는 동네가 있다면 차려 놓은 것을 먹고 병자들을 고치며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되

영접하지 않는 동네에서는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하라고 하지요.

이는 곧 심판이 그들에게 가까이 옴을 뜻하는 행동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이런 이야기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행 13:50-51”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

두 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자, 4-11절을 정리해볼까요?

돈처럼 내가 의지할 것은 다 내려놓고

급히 아무 집에나 가서 하나님의 평안을 빌었을 때

준비된 영혼이라면 우리를 맞이할 것이고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면 됩니다.

그런데 만약 거부한다면 억지로 들어가려 하지 말고

그저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음을 이야기하면 됩니다.

쉽죠?

표현을 바꿔보자면,

누군가를 만났을 때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라고 말했을 때 거기에 응답하고 더 이야기하자고 맞아들이는 사람과는 예수님에 대해 더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억지로 전하지 말고 그저 예수님의 이름을 그에게 이야기한 것으로 만족하십시오.

이것이 참 쉬운 방법 같아 보입니다만

매우 강력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보내시는 자들에게 권세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16절을 함께 읽어보실까요?

예수께서 권세를 주셨기에

아니라 다를까 17절 말씀에서 보면

70인이 돌아와 말하길,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할 때 주의 이름 앞에 귀신들도 항복했다고 보고합니다.

참 놀랍습니다.

우리 인간은 연약하여 귀신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고 그 지배 아래 놓일 수도 있지만

그 반대로 오히려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18-19절 같이 읽어볼까요?

막 16: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예수를 믿고 그 이름의 능력을 신뢰하는 사람을 귀신이 감히 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물리칠 때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갑니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약 4:7)

이 놀라운 권능을 누구에게 주십니까?

주의 이름과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그렇게 사역하고 돌아온 70명이 자신들이 사역한 결과에 대해 격양되어 있을 때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20절 같이 읽어보실까요?

무슨 말씀일까요?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을 각각 심판책과 생명책이 존재함을 말씀합니다. [2]

단 7:10 “불이 강처럼 흘러 그의 앞에서 나오며 그를 섬기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서 모셔 선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

이 책에 인간의 모든 행위가 기록되어 있어서 그 행한 대로 심판 받음을 말씀합니다.

계 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생명책은 말 그대로 그 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는 하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께서 이 70인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안 믿는 자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악한 마귀와 싸워 그들을 물리치는 것도 참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렇게 영혼들을 추수하고 예수의 권능으로 마귀를 쫓는 내가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 것,

즉 믿음의 결국, 영혼의 구원을 받음을 기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천하를 다 얻고도 영혼을 잃으면 무슨 소용입니까?

이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일 착한 일 많이 했어도, 심지어 다른 사람을 구원시켰어도 내 영혼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하여 영생을 누리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입니까?

자,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알고 기뻐할 수 있습니까?

마10:32-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다른 사람 앞에서 예수를 시인하면,

즉 예수를 전하면 예수께서도 하늘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시인하신답니다.

즉, 구원을 허락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럼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며 예수의 이름을 시인한 이 70명은 예수께서 하나님 앞에서 시인할까요 안할까요?

당연히 시인하시겠죠.

그들의 이름이 하늘 생명책에 기록된 겁니다 (20절).

단 12:1-3”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큰 군주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전도하고, 예수를 전하는 것은

다른 사람 좋으라고 하는 겁니다만

더 나아가 우리 좋자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며 예비된 영혼을 추수하지만

이것은 결국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는 가장 확실한 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제일 좋은 방법은 무엇입니까?

가르쳐 주는 거에요.

내가 정말 예수 안에 거하고 예수께서 내 안에서 살아 역사하시는지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른 이에게 그 예수를 전하는 거에요.

그렇게 예수를 전할 때

때론 거부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어요.

그럼 다른 이에게 가서 또 전하세요.

여러분이 그렇게 예수의 이름을 시인하며 전할 때

예수께서도 여러분의 이름을 하나님 앞에서 시인하실 겁니다.

“아버지! 이 귀한 자녀는 삶의 어려움 속에서도 나 예수를 시인하며 전하기에 힘썼습니다. 이 자녀를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나게 하소서”

라고 말씀하시지 않을까요?

[1] 성경전서(관주 해설)(Nkgo88ti)(색인)(개역개정판) (대한성서공회, 2009). 눅 10:1; “It is often assumed, for example, that the symbolism is intended to allude to the future proclamation of the gospel to all the countries of the world. But even in this case there is uncertainty, for in the Hebrew text of Gen 10 the several nations of earth total seventy,” Roger L. Omanson and Bruce Manning Metzger, A Textual Guide to the Greek New Testament: An Adaptation of Bruce M. Metzger’s Textual Commentary for the Needs of Translators (Stuttgart: Deutsche Bibelgesellschaft, 2006), 127.

[2] John D. Barry et al., Faithlife Study Bible (Bellingham, WA: Logos Bible Software, 2012), Lk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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