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1016 사랑하십니까? 눅 10:25-37
본문 첫 절에서부터 긴장감이 돕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에게 다가와 질문을 하는데 시험, 즉, 곤경에 빠뜨리려고 묻고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시험을 하려고 물어봤단 얘기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이미 알고 있다는 말이죠.
아니나 다를까, 율법에 뭐라고 써 있고 어떻게 읽었느냐고 되물으시는 예수의 말씀에 이 율법교사가 잘 대답합니다.
27을 같이 읽어보실까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신명기 6장에 있는 말씀인데요,
‘쉐마’라 하여 지금까지도 유대인들이 줄줄 외우는 말씀입니다.
이 율법교사가 이것을 모를 리 없었겠지요.
그래서 더 자신 있게 말했을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레위기 19:18 말씀의 인용이었습니다.
예수께서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이 가장 큰 계명이요 영생을 얻는 길임을 인정하셨습니다.
28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그런데 율법교사가 더 잘 보이고 싶어서 또 다른 것을 묻습니다.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그 때 예수께서 한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갑니다.
여리고는 그림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사해 위의 요단 계곡에 위치한 도시로 너른 평야가 있는 굉장히 비옥한 도시였습니다.[1]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여리고까지 가는 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막과 돌산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강도들이 숨기에 아주 적합했다고 합니다.[2]
견해에 따라서는 이 강도들은 당시 사회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라고도 합니다.
로마 지배에 있었기에 청년들은 변변한 일자리를 찾기가 어려웠고
로마를 위해 일하느니 독립을 위해 일하자는 청년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른 바 ‘열심당원’이라 하였는데요,
먹고 살 거리가 마땅하지 않으니 이런 험한 곳에서 의적 노릇을 했다고도 합니다.[3]
그러나 그들의 배경이 어찌되었든 한 사람을 심하게 때려 거의 죽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죽게 된 이 사람을 누가 봅니까?
한 제사장이 지나가다 봅니다. / 하지만 그냥 지나칩니다.
또 누가 봅니까?
한 레위인이 보지만 / 그도 역시 그저 지나쳐 갑니다.
공무가 바쁘셨는지, 피를 묻히면 부정하게 된다는 율법 때문이었는지 그들은 그저 그렇게 지나갑니다.
그렇게 두 명이 지나간 뒤 등장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사마리아인 입니다.
그가 어떻게 했는지 다시 보실까요?
33. 불쌍히 여겨
34. 응급처치, 자신의 탈 것을 내주고 숙소까지 데려가 돌봄
35. 돌볼 비용을 여관주인에게 주고 모자라면 더 줄 것을 약속
그냥 대충 도와주고 만 것이 아니에요.
끝까지 책임졌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제사장과 레위인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긍휼과 실질적인 도움을 이 사마리아인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 물으십니다.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생각해 보시죠.
이 율법교사가 얼마나 당황했을까요?
분명 이 사람은 예수님에게 ‘내가 사랑할 이웃은 누구입니까’ 라고 물을 때 자신을 옳게 보이려는 의도였습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레위기 19:18에서 말씀하는 이웃은 이스라엘 동포들에 한정되어 있었는데요,
같은 이스라엘 사람들과 원수지는 일 없이 잘 지내고 있으니 이웃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러니까 29절에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고 물은 의도 중에는 ‘이미 난 내 이웃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나 대단하지 않습니까?’ 라며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모습이 있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이 율법교사의 옳게 보이려는 의도를 보기 좋게 뒤집어 엎으신 거죠.
강도 만난 자를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한 사람은,
즉 누구보다 영생 얻을 계명을 잘 지킨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라고 불리며 율법을 누구보다 잘 알던
제사장도, 레위인도 아닌 사마리아인 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증오하고 멸시하던 그 사마리아인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행함이 없고 말뿐이고 지식으로만 가득한 신앙을 지적하십니다.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계명이요 영생을 얻는 길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율법교사였지만
그에게는 그 사랑의 실천이 없었어요.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주의 말씀은 곧 그런 사랑의 실천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누가복음 6:31, 35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사랑하고 계십니까?
나를 원수로 여기는 사람마저도 사랑하십니까?
혹시 내 남편이나 아내가 원수 같을 때가 있으십니까?
내 자식이 원수 같아 보일 때가 있습니까?
이번 수련회가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입니다.
혹시 저에게 물으실지 모르겠어요.
"당신은 그렇게 사랑합니까?"
부끄럽지만 그렇게 사랑하지 못함을 인정합니다.
어쩌면 오늘 이야기 속의 제사장이나 레위인 같을 때가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제가 감히 이 자리에서 말씀 드릴 수 있는 것은
죽을 수 밖에 없는 나를 위해 대신 죽으신 예수의 그 사랑이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라고 여전히 강권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나에게는 그런 사랑이 없을지라도 예수의 그 뜨거운 사랑이 나로 하여금 이웃을 향하여 움직이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저 교회에 잘 출석하는 신앙인이 되는 것에 만족하지 마시고
성경 지식은 가득한, 그러나 사랑이 없는 자가 되지 마시고
먼저 가서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 주십시오.
주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1] Lawrence E. Toombs, “Jericho,” ed. Mark Allan Powell, The HarperCollins Bible Dictionary (Revised and Updated) (New York: HarperCollins, 2011), 439.
[2] J. Nolland, Luke 9:21-18:34 (Word Books, 1993), 593.
[3] https://www.facebook.com/permalink.php?story_fbid=1119293184784134&id=1000011038906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