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1716 ‘빼앗기지 않을 선택’ 눅 10:38-42
수련회 은혜 가운데 잘 다녀와서 감사와 영광을 주님께 돌립니다.
이번 수련회가 좋았던 것은 깊이 있는 말씀의 나눔과 우리의 눈을 열어준 특강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만
잘 먹고 잘 쉴 수 있었던 것도 큰 몫을 했습니다.
잘 먹이기 위해, 다들 쉬는 중에도 주방에서 분주히 움직이시는 분이 계셨어요.
다시 한 번 감사 드립니다.
그래도 우리는 수련회를 간 것이었기에
다같이 먹고 치우고 모임 때는 모임에 집중했습니다만
만약 우리 집에 손님이 오신 것이라면
어느 정도 음식을 먹고 차 한 잔 하기까지 집 주인은 바쁘기 마련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렇게 손님을 대접하느라 바쁜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바로 마르다 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마르다가 사는 마을로 들어가십니다.
요한복음 11-12장 기록을 통해서 마르다가 사는 마을이 베다니 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다니에 사는 마르다/마리아의 오라비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고 소개하고 있거든요.
그 곳에서 마르다가 예수를 자기 집으로 모셔 들입니다.
몇 차례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중동 지역에서의 손님 접대는 대단했습니다.
한 예로, 우리가 아까 읽은 창세기 18장을 다시 생각해 볼까요?
18:2에 보면 아브라함이 낯선 사람들을 보자마자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혔’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간곡한 말로 편히 쉬었다 가길 청합니다.
6-7절에는 고운 가루로 떡을 만들고 기름진 송아지를 잡아 요리하여 대접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렇듯 이들의 손님 접대는 대단했습니다.
아마 마르다도 아브라함의 상차림에 전혀 뒤지지 않았을 거에요.
요한복음 11장의 이야기 중에서
마르다가 오라비의 죽음 앞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라고 고백하는 장면이 있는데요,
존경하는 어른만 오셔도 상 다리가 휘어지네 부러지네 하는데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을 집에 모시니 마르다가 얼마나 정성을 들였겠습니까?
아닌 게 아니라, 40절에는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하”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아주 대비되는 한 여인의 모습이 또 등장하지요.
39절을 같이 읽어보실까요?
예수께서 아마 음식이 준비되는 동안
열두 제자와 혹은 주변의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던 모양입니다.
그 때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도 주의 발 앞에 앉아 주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습을 마르다가 보았습니다.
가뜩이나 귀한 손님이 오신데다가 준비할 것도 많아서 일손이 부족한데
동생이라는 것이 일손을 돕지는 못할 망정 편하게 이야기나 듣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 여자분들 한 번 생각해 보시지요.
설이나 추석 명절에 온 식구가 다 모이는데 막내 며느리가 제일 늦게 와서 시아버지 앞에 딱 앉아서 깔깔거리면서 얘기만 하고 아무 일도 도와주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막내 동서가 얼마나 미울까요?
마르다도 많이 화가 났어요.
아예 예수님께 따지죠.
40절을 같이 읽어볼까요?
‘예수님! 예수님 맛있는 것 해 드리려고 난 이렇게 바빠서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마리아도 저를 돕게 해 주셔야지 왜 여기서 가만히 얘기나 듣게 하십니까?
저 좀 도와주라고 하세요.’
그런데 베일리 교수에 의하면 이것은 단순히 주방 일을 돕지 않아서 투덜거리는 것만은 아니라고 합니다.
39절에 마리아가 예수의 발 아래 앉아 있다는 말은 단순히 설교를 듣는 것을 넘어서서
랍비, 즉 선생의 교훈을 받는 제자의 자세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의 발 아래 앉아 있는 마리아는 예수의 제자 였던 겁니다.
그런데 이게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여자가 랍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당시 풍속에서는 흔한 일이 아니었고
더군다나 남자들 사이에서 그렇게 선생의 말을 듣고 있다는 것이 조신하지 못하다고 여겨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베일리 교수는 오늘 본문의 마르다의 투덜대는 모습을 이렇게 각색합니다.
“이런 창피한 일이! 하필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다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 여동생이 남자들과 함께 있네. 이웃 사람들이 뭐라할까? 집안에서는 뭐라고 생각할까?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누가 쟤를 신부로 맞겠어? 꿈도 못 꾸게 생겼네!”[1]
아마 우리 옛 어른들이 남자 아이들은 대학까지 나와야 하지만 여자 아이들은 고등학교만 나와도 잘 했다고 뭘 대학까지 가냐고 했던 것과 비슷할 것 같아요.
조신하게 집안 일이나 잘 배워서 시집이나 잘 가면 되지 랍비한테 뭘 그렇게 큰 가르침을 받겠다고 제자까지 되느냐고 마리아를 타박하고 있는 마르다의 모습을 봅니다.
언뜻 보기에는 마르다의 입장이 이해가 됩니다.
또 예수와 그 제자들을 손님으로 모셨으니 마리아도 얼른 접대하는 일을 도와서 잘 대접하는 게 맞는 것 같기도 해요.
그런데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41-42절을 같이 읽어보실까요?
마르다가 많은 일을 해야 돼서 염려도 많고 근심도 많다고 하십니다.
정확히 보셨지요.
혼자 반찬을 하다가, 국을 하다가, 다과를 내가다가, 얼마나 바빴겠습니까?
특히 새번역 성경은 이 부분에서 ‘마르다가 들떠있다’라고 표현했더라고요.
들떠서 주방에서 안달을 내고 있는 주부의 모습을 생각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네가 우리를 대접하느라 애쓴다 하면서 칭찬하거나 격려하지 않으셨어요.
오히려 몇 가지 혹은 한 가지만으로도 족하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새번역 성경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이다.”
그러면서 마리아는 염려하고 근심하는 여러 가지 일이 아니라 좋은 한 가지를 택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좋은 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대체…
주의 일이 많지 않다는 것은 무슨 뜻이고 마리아가 택한 좋은 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역시 베일리 교수의 글이 도움이 됩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일이 많아 걱정도 하고 힘들어하는구나. 나도 다 이해한다. 그러나 한 가지가 아쉽구나. 나는 네가 음식 한 접시 더 놓는 일보다, 내가 양식을 베푸는 이라는 것을 깨닫고 네 동생은 이미 좋은 쪽을 택했다는 것을 깨달았으면 한다. 네가 네 여동생으로부터 이 좋은 것을 빼앗는 일을 허락하지 않겠다. 내겐 맛난 음식보다 좋은 학생이 더 중요하단다.”[2]
결국 마리아가 택한 좋은 것은 무엇이라는 이야기인가요?
결코 빼앗기지 않는다는 마리아의 선택은
음식 준비하는 분주함이 아닌
주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좋은 학생의 모습이었습니다.
다시 한번이요,
내가 양식을 베풀기 위해 분주한 것이 아니라
예수로부터 영원한 양식을 받기 위해 좋은 제자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마리아의 선택이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주의 일을 한다고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바쁘다고 하지만
그 중에 가장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다른 것은 다 포기하더라도 붙잡아야 하는 것은
주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주의 발 아래에서 그의 말씀을 바로 듣고 그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기억하십니까? (눅 8:4-15)
씨가 길 가에 떨어지고, 바위 위, 가시떨기, 그리고 좋은 땅에도 떨어집니다.
씨는 곧 하나님의 말씀을 비유하고요.
특히 가시떨기에 씨가 떨어졌다는 비유는
말씀을 들었어도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 때문에 결실을 맺지 못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반면, 좋은 땅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라고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마르다와 마리아는 각각 어느 비유에 속하겠습니까?
마리아는 좋은 땅일 수 있지만
마르다는 가시떨기에 씨가 떨어진 것과 같겠지요.
사실, 이 말씀을 놓고 본다면,
교회 일을 많이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봉사 많이 하시는 분들이 오히려 말씀에 충분히 빠져들 기회가 많지 않아요.
오히려 어떻게 하면 잘 먹일까를 고민하다가 정작 자신은 먹지 못해요.
예수께서는 내가 생명의 떡이다 라고 나를 먹으라고 말씀하시지만
바쁘고 분주해서 그 생명의 떡을 먹지 못하니까
내 생각, 내 염려, 내 방법으로 다른 이들을 섬기려고 해요.
세상살이도 마찬가지죠.
어떻게 먹을까, 어떻게 입을까,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까를 내 방법으로 고민하고 염려하니까 근심이 끝이 없어요.
하지만 오늘 본문에 나타난 마르다와 마리아의 모습 중에 누가 더 행복해 보이십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한 가지만으로 족하니라”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단순해 지라고 말씀하세요.[3]
주의 발 아래에 앉아 주의 말씀을 듣기 원하세요.
세상 명예, 권력, 돈이 아니라
그 분의 말씀을 따르는 제자가 되길 원하세요.
복잡한 사회 사업이나 화려한 예식을 차리기에 앞서 그 분의 말씀을 듣고 따르고 행하길 원하세요.
제자의 삶에 대해 복잡하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세요.
어떻게 다 포기하고 주를 따르라고 하십니까?
내가 하던 것 어떻게 하고 무작정 말씀만 들으라고 하십니까?
내가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렇죠.
우리 얼마나 복잡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까?
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그 많은 일들을 내 생각으로, 내 욕심으로 하고 있다면 멈춰야 합니다.
목회도 마찬가지 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그 자리에 멈춰서 주께서, 주의 그 말씀이 우리를 움직이게 하셔야 하는 겁니다.
우리의 삶이 우리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영광을 구하는 삶이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주의 발 아래 엎드려 주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택하시겠습니까?
주를 위한 여.러.분.의 열심입니까?
아니면 주님입니까?
빼앗기지 않을 좋은 것을 택하시길 바랍니다.
[1] 케네스 E. 베일리,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고대 중동의 삶, 역사, 문화를 통해 본 복음서, (서울: 새물결풀러스, 2016), 300
[2] 베일리, 300.
[3] J. Nolland, Luke 9:21-18:34 (Word Books, 1993), 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