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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416 우리의 삶을 만드는 기도 –눅11:1-13


죄송하지만 지난 주에 있었던 집안 일을 먼저 좀 이야기할까 해요.

지난 주에 저희 집에 에어컨을 설치했습니다.

이사올 때 아예 설치했으면 수월할 뻔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결국 아내가 안되겠다고 장모님께 말씀 드리고 설치를 끝내 이루어내고 말았습니다.

설치한 그날 저녁 장모님 하시는 말씀이 ‘우리 연주는 어렸을 때부터 해줄 때까지 졸랐어’ 하시는 겁니다.

그게 월요일 저녁이었는데요,

그 다음날 설교 준비한다고 본문을 딱 폈는데 오늘 이 말씀인 거에요.

6절 말씀에 간청함을 인하여 요구대로 준다 하잖습니까?

이 말을 쉽게 하면 하도 조르니까 해준다는 말이거든요.

예수께서 하신 이 이야기를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볼까요?

5-8절 이야기를 보면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A 라는 친구가 B 라는 친구를 한 밤 중에 찾아왔어요.

와서 하는 말이 C라는 친구가 찾아왔는데 내가 줄 게 없으니 좀 꾸어달라고 요청하는 겁니다.

듣기에 따라서는 ‘남한테 빌려서까지 손님을 대접하려고 하나’ 하고 오지랖도 넓다 할 수도 있지만

손님을 절대 외면하지 않던 중동의 문화를 생각하면 좀 이해가 됩니다.

그래도 어쨌든 한 밤 중에 빵을 꾸어달라는 요청을 받은 친구는 어리둥절하겠지요.

그럼에도 그 부탁을 들어준다고 합니다.

친구의 우정 때문이 아니라

하도 문을 두드리고 조르니까 줬다는 거에요.

빵을 줘야 갈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렇게 조르는 모습을 잘못됐다 하지 않으시고 그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9절 말씀을 보실까요?

동사가 세 가지가 나오는데요,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입니다.

바로 앞에 나온 이야기에서 간청하는 친구의 모습이 이와 같지 않았습니까?

나를 찾아온 친구에게 대접할 음식을 구하면서

그 음식을 찾아,

그리고 자고 있는 친구에게 찾아가

그의 집 문을 두드리며 요청했습니다.

조금은 뻔뻔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런 모습을 주께서는 간청이라 표현하시면서 이렇게 간구하라 하십니다.

이 간구의 응답은 어떨까요?

10절을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아주 간단하고 명료합니다.

(누구든지)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고

(누구든지) 찾는 이는 찾을 것이고

(누구든지)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도저히 주지 않고는 베길 수 없는 그 간절함 때문에

구하는 이마다 받고 찾는 이마다 찾고 두드리는 이마다 열릴 것이다 말씀하시는 거죠.

왜 이 간구와 응답의 관계가 명확할 수 밖에 없는지 예수님의 다음 설명을 들으면 더욱 잘 이해가 됩니다.

11-12절 같이 읽어보실까요?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아무리 못된 부모라도 일부러 뱀이나 전갈을 줘서 아이에게 해를 입게 하겠습니까?

이 뱀과 전갈은 단순히 아이가 못 먹는 음식일 뿐만 아니라 맹독을 가진, 다시 말해, 아이를 죽일 수 있는 것들 아닙니까?[1]

이런 우리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아는데

하물며 하늘 아버지께서 간절히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말씀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아버지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우리 아버지께서는 온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분 아닙니까?

우리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분 아닙니까?

그렇게 지음 받은 우리가 죄에 빠져 허덕이고 있을 때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자녀 삼으신 것 아닙니까?

그 자비와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 된 우리가 구하고 찾고 두드릴 때 좋은 것을 반드시 주신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9절과 10절 말씀을 자세히 보시면,

무엇을 구하든지 얻으리라고는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구하는 이마다, 찾는 이마다, 두드리는 이마다 그 답을 얻는다고 하시면서

간구하는 사람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지,

구하는 것마다, 찾는 것마다, 두드리는 것마다 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그럼 자연스레 우리는 묻게 되죠.

대체 그렇게 간절히 구하고 찾고 두드려서 얻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당장 돈이 필요하고, 명예가 필요하고, 친구가 필요하고, 사회적 지위가 필요한데

이런 것들 구하고 찾고 두드려서 얻는 것 아니면 도대체 무엇을 위해 간청을 하고 간구하란 말입니까?

13절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까?

결국 예수께서 우리에게 구하고 찾고 두드려서 얻으라고 하신 것은 무엇이에요?

성령입니다.

조금 허무하십니까?

그런데요,

이 간구는 아주 놀라운 간구입니다.

성령께서는 곧 하나님 이시요, 예수님 아니십니까?

우리가 구하고 찾고 두드릴 때 그 성령 하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구원자 되시고 모든 것 되시는 그 예수를 분명하게 모셔 들이게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생각나게 하시기에 그 분을 본받아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의 삶이 우리의 생각과 뜻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삶의 방식을 따라가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붙잡아 주십니다.

그것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막연합니다.

대체 하나님 나라의 삶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그렇게 간청해서 성령을 받았을 때,

그 성령께서 우리를 통해 이루어가실 하나님 나라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요?

그 답은 오늘 본문 1-4절, 주님 가르쳐 주신 기도에 있습니다.

그 첫 번째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삶’ 입니다.

주님 가르쳐주신 기도의 첫 번째는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면서도 그 분의 거룩한 이름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구약 많은 믿음의 조상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환상을 보고 역사를 일으켰지만 하나님을 감히 아빠라 부르지 못했어요.

그러나 예수께서는 친히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빠라 부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나와 정말 가깝고 친근한 관계라는 말입니다.[2]

그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라고 기도합니다.

이미 거룩하신 그 분의 이름을 왜 또 거룩히 여김을 받으라고 간구합니까?

이 말은 곧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모셨으니 그의 자녀인 우리도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란 간구입니다.[3]

이어서, 구하고 찾고 두드려서 성령을 받은 자의 삶은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삶’ 입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라는 간구는 간단하지만 강력합니다.

이 기도는 단순히 이스라엘의 회복, 다윗 왕조의 회복을 위한 기도로만 이해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땅 끝에서 땅 끝에 이르는 온 인류가 구원받고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실현되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 마음에 임하였지만 아직도 우리가 소망해야 하는 그 나라, 바로 하나님 나라 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통치를 소망하며 사는 사람은 허투루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맞이하기 위한 정결한 신부의 모습으로, 때로는 충성된 청지기의 모습으로 이 땅에서의 삶을 성실히 살아야 합니다.

또한, 주님의 기도를 통해 우리는 ‘삶의 기본을 주께 의탁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한 학자는 일용할 양식을 ‘영원한 양식’으로 해석했습니다.[4]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경제적 궁핍이다…지금은 근근이라도 살아가는데 미래에는 어떨까?...일을 할 수 없을 때는 어떻게 될까?...인간의 영혼이 겪는 가장 크고 깊은 충격을 주는 두려움 가운데 하나가 먹을 것이 충분하지 않을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다.

어쩌면 예수는 주기도에서 제자들에게 이런 두려움으로부터 풀려나기를 기도하라고 가르치시는지도 모른다. 양식이 끊이지 않기를 기도하는 것은 빈곤해질까 봐 두려워하는 실존의 고뇌로부터 구원받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아빠 하고 기도 시작하셨잖아요?

그럼 밥 주실 것도 기대하는 거에요.

될 수 있으면 아이가 배 고프다고 칭얼대기 전에 미리 밥 준비해 놓고 주려는 것이 부모 마음 아닙니까?

내가 걱정하지 않아도 주께서는 다 아시고 채우십니다.

또한, 성령 받은 자가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삶은 ‘화평을 이루는 삶’ 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기도를 가르쳐 주신 후에 예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 6:14-15)

그러니까 오늘 본문 4절의 말씀은

그리스도 십자가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케 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오히려 비판하고 정죄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우리를 화평케 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용납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이성과 힘으로 가능합니까?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때 가능한 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으로 인해 누리는 하나님 나라의 삶은 ‘승리하는 삶’ 입니다.

제가 어제 실은 바리스타 2급 시험을 보고 왔습니다.

필기 시험과 커피 추출 시연이 있었는데요,

필기 시험은 예상 문제가 있어서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런 도움이 전혀 없었다면 말 그대로 시험에 들었을 거에요.

마지막 말씀도 그렇게 이해해 보고자 합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수많은 시험, 즉 죄의 유혹들이 우리 앞에 놓입니다.

하지만 모범이 되시는 예수를 잘 따른다면

아무리 넘기기 힘든 죄의 유혹이 다가온다 하더라도

이미 답을 다 알고 있는 예상 문제와 같지 않을까요?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간청하는 자는 분명 응답을 받습니다.

주께서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은 바로 여러분의 것 입니다.

그러나 그 간청은 우리의 욕망을 위한 것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위한 성령 충만한 삶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 삶은 바로,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따라 사는 거룩한 삶이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성실하게 사는 삶이고

내 삶의 기본적인 필요들을 온전히 주께 맡기어 드리는 삶이고

나를 용서하신 아버지의 사랑 본받아 용서하는 삶이고

스승이신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죄와 싸워 승리하는 삶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령을 구하며 찾으며 두드릴 때 아버지께서 허락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삶입니다.

모두 이렇게 성령충만하여 하나님 나라의 삶을 지금 이 순간부터 누리시는 여러분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1] J. Nolland, Luke 9:21-18:34 (Word Books, 1993), 630.

[2] 김세윤, 주기도문 강해, (서울: 두란노 아카데미, 2016), 79

[3] 위의 책, 81; 베일리, 173

[4] 베일리, 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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