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3116 “헛된 것을 구하지 말고” 눅 12:13-21
아시는 분들도 있습니다만 제가 얼마 전 건강보험에서 제공하는 건강검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아주 충격적이었습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결과는 바로… 운동부족 이었습니다.
이런 저런 질병들이 운동부족으로 발병할 수 있다는 결과와 설명들을 보고 제 자신을 좀 돌아보게 되더군요.
게으르지 말고 운동 좀 해야겠구나 하고요.
또, 더 이상 ‘젊음을 맹신할 수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붙잡아 주시지 않으면 이 연약한 생명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의술이 좋아졌다고 해도 인생 길어야 100년 아닙니까?
그런 우리 인생의 끝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고 하나님 앞에서의 심판이 있습니다 (히 9:27).
긴 듯한 인생을 참 열심히 살았는데
어느 순간 끝이 다가와 뒤를 돌아봤을 때 무엇 하나 손에 잡히는 것 없이 허무하기 짝이 없다면 얼마나 안타까울까요?
한편으로는 안타깝지만 이것이 솔직한 우리 인생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아까 읽으신 전도서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이 전도서는 세상 그 누구보다 지혜롭고, 많은 부와 명예를 누리며 살았던 솔로몬 왕의 고백이에요.
전 1:2 “…헛되고 헛되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전 1:14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을 보니 그 모두가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
전 2:20 “세상에서 애쓴 모든 수고를 생각해 보니, 내 마음에는 실망뿐이다.”
이건 뭐 위로할 수도 없어요.
그냥 다 맞는 말이에요.
그저 ‘이토록 인생이 허무한 것이라니…’ 라고 공감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함께 읽은 복음서에는 인생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날 줄 모르던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람 중에 하나가 예수께 나와서 말합니다.
‘선생님! 내 형에게 말해서 받은 유산을 나와 나누라고 해 주세요.’
아마 이 사람의 형이 부모의 유산을 가로챘든지,
상식 이상으로 많이 받은 모양입니다.
당시 관습상 첫째 아들이 다른 형제들에 비해 두 배의 유산을 가질 권리가 있었다고 합니다.[1]
이것은 율법에서도 명명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두 아내를 두었는데 하나는 사랑을 받고 하나는 미움을 받다가 그 사랑을 받는 자와 미움을 받는 자가 둘 다 아들을 낳았다 하자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이 장자이면
자기의 소유를 그의 아들들에게 기업으로 나누는 날에 그 사랑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삼아 참 장자 곧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보다 앞세우지 말고
반드시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인정하여 자기의 소유에서 그에게는 두 몫을 줄 것이니 그는 자기의 기력의 시작이라 장자의 권리가 그에게 있음이니라” (신 21:15-17)
미운 아내가 낳은 아들이라고 해도 첫 번째로 태어난 아들이라면 엄연히 장자로 인정하고 두 배의 유산을 상속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관습적이었고 법적이었어도 억울한 것을 참을 수 없었는지 예수를 랍비, 즉 선생으로 여겨 분쟁을 해결해 달라고 온 것이지요.
실제로 당시 랍비들은 이런 사소한 분쟁들을 지혜롭게 해결해 주곤 했답니다.[2]
그런데 예수님 대뜸 하시는 말씀이,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분배인으로 세웠느냐?"
그러면서 되려 탐심을 물리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마 예수께 찾아온 그 사람 마음이 단순히 공평한 처사를 바란 것이 아니라
자신이 더 많은 유산을 차지하려는 탐심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을 주께서 보신 거겠지요.
그러면서 사람의 생명의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
즉 부자여서 영원히 사는 것은 절대 아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천문학적인 자산을 가지고 있고, 아무나 함부로 탈 수 없는 고급 자동차를 타고, 대궐 같은 저택에 산다고 해도 그런 것들이 영원한 삶을 보장해 주지 않는 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겉으로는 아니라고 해도 그 많은 재산이 영원히 함께 하기를 바랄 뿐이지요.
여기 예수님의 비유가 있습니다.
한 부자가 밭에서 많은 소출을 거뒀어요.
이미 부자였는데 더 많은 부를 누리게 되었어요.
이 사람이 행복한 고민에 빠집니다.
17절 말씀 대로 마음 속으로 말하는 거에요.
‘내가 더 곡식을 쌓을 곳이 없네… 이를 어쩐다.. 그래! 지금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지으면 지금 거둔 소출까지 더 많이 담아 놓을 수 있을거야!
아, 이렇게 부를 쌓아놨으니까 난 이제 떵떵거리면서 평생 편히 먹고 놀면 되겠구나’
그러나 그 날 밤 들리는 음성,
20절을 같이 읽어볼까요?
타이밍이 기가 막힙니다.
혹시 하나님이 심술꾸러기처럼 느껴지십니까?
좀 누리겠다는데 그거 못마땅해서 목숨을 거둬가다니요?
그런데 여기, 솔로몬의 고백을 보시지요.
“사람이 지혜가 있다고 해서 오래 기억되는 것도 아니다. 지혜가 있다고 해도 어리석은 사람과 함께 사람들의 기억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린다. 슬기로운 사람도 죽고 어리석은 사람도 죽는다.
그러니 산다는 것이 다 덧없는 것이다. 인생살이에 얽힌 일들이 나에게는 괴로움일 뿐이다. 모든 것이 바람을 잡으려는 것처럼 헛될 뿐이다.
세상에서 내가 수고하여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을 내 뒤에 올 사람에게 물려줄 일을 생각하면, 억울하기 그지없다.
뒤에 올 그 사람이 슬기로운 사람일지, 어리석은 사람일지, 누가 안단 말인가? 그러면서도, 세상에서 내가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지혜를 다해서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을, 그에게 물려주어서 맡겨야 하다니, 이 수고도 헛되다.
세상에서 애쓴 모든 수고를 생각해 보니, 내 마음에는 실망뿐이다.” (전 2:16-20, 새번역)
하나님이 심술꾸러기가 아니라 인생이 원래 그렇다는 겁니다.
평생 자기 자신을 위해 그렇게 쌓아둔 들 그날 밤 영혼이 떠나면,
즉, 육신의 숨이 끊어지면 그렇게 쌓아둔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냐고요?
절대 나의 것이 되지 않습니다.
한 예로, 국내 한 기업은요,
아버지가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아버지가 일군 기업과 많은 재산을 차지하겠다고 한국과 일본을 넘나들면서 형제끼리 싸우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께서는 이 부자 이야기를 하시면서 마지막 결론에서 그의 모습을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와 이와 같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대하여’는 쉽게 이야기해서 ‘하나님 앞에서’ 라는 뜻이고요,[3]
하나님 앞에서 부요하지 못하다는 말씀은 곧 하나님 원하시는 부가 아니었다는 것이죠.
점점 모르는 소리를 한다고요?
우리가 지난 주에 주기도문을 함께 나누면서 끝내 우리가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할 것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세상 명예와 부와 권력이 아닌, 성령과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이라고 했습니다.
그 나라의 삶은 주께서 주시는 영원한 양식에 감사하는 삶이지, 그저 나만을 위해 쌓아놓고 즐기는 삶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 속의 부자를 보십시오.
그의 모습이 과연 성령에 충만한 자의 모습이며,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자의 삶입니까?
그 날 일용할 양식에 감사하는 자의 모습입니까?
분명 아닙니다.
나 편하게 먹고 살려고 잔뜩 쌓아놓고 사는 삶은 분명 주의 뜻이 아님을 보게 됩니다.
미래에 대한 걱정 때문에 그렇게 쌓아두신다고요?
오늘 본문 뒤의 22-31절을 함께 읽어보실까요?
기가 막힙니다.
마치 들에 핀 백합화처럼, 자유롭게 날개짓하는 새들처럼 의식주 걱정 없이, 온전히 주께 맡겨드리고 오로지 하나님 나라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 채워주신다고 합니다.
“아뇨, 목사님!
목사님이 아직 젊어서, 인생 얼마 안 살아봐서, 삶이 얼마나 퍽퍽한지 몰라서 하는 소립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 나라 위한답시고 내 삶을 위한 걱정도 하지 말란 말입니까? 내 가족들은 어쩌고요?”
라고 말할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네, 제가 알아야 얼마나 알겠습니까?
제가 무슨 능력이 있어서 여러분의 삶을 책임지겠다고 이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제가 어떻게 여러분 삶의 걱정을 덜어 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께서 방금 읽으신 그 말씀은 저의 약속의 아니라,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에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에요.
그 분을 믿으신다면 말씀대로 따라야 하는 거잖아요.
골로새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심을 받았으면,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여러분은 땅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지 말고, 위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3:1-3)
네, 제가 알아야 얼마나 알고 살아봐야 얼마나 살았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압니다.
인생에서 가지려고 움켜쥘수록 걱정이 커지고 허무한 마음이 더 커져 간다는 것 정도는 저도 압니다.
그리고 그 인생은 반드시 끝이 있다는 것도 분명히 압니다.
무엇보다도 그 인생의 끝에서 내가 움켜쥐고 있던 그 어떤 것도 가져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오늘의 말씀들이 증거하고
여태껏 지켜보았던 사람들의 죽음이 이를 증거합니다.
가져갈 수 없는 이 땅의 것을 움켜쥐느라고 애쓸 것이 아니라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내 앞에 드러난 먹고 살 문제 때문에 걱정하지 말고 이 모든 것을 공급하신다고 약속하신,
신실하신 주를 바라보자는 것이에요.
그렇게 주님께 온전히 속해 있을 때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에 싸여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속한 지체의 일들, 곧 음행과 더러움과 정욕과 악한 욕망과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숭배입니다.” (골 3:4-5, 새번역)
그럼, 지금 당장 회사 다 때려 치고 산 속에 들어가서 기도나 해야 합니까?
아뇨!
더 열심히 여러분이 지금 계신 그 곳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삶을 사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계신 그 곳을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어 가셔야 합니다.
Paradigm Shift! 변화를 일으키셔야 합니다.
여태까지 나를 위해 돈을 벌고
나를 위해 시간을 즐기고
나를 위해 사람들을 만났다면,
이것을 하나님께 대하여,
즉, 하나님 뜻을 위해 돈을 벌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그 돈과 시간을 사용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나를 위한 삶은 허무할 뿐이에요.
자기만을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는 자는 만약 오늘 목숨을 잃는다면 손에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면,
훗날 하나님 나라와 영광이 우리의 것이에요.
세상의 것을 위한 염려와 탐욕은 더 이상 우리가 추구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 / 오직 그 분만을 구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 오직 그 분만을 소망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 오직 그 분만을 따라가십시오.
[1] J. Nolland, Luke 9:21-18:34 (Word Books, 1993), 685.
[2] Biblical Studies Press, The NET Bible First Edition Notes (Biblical Studies Press, 2006), Lk 12:13.
[3] Max Zerwick and Mary Grosvenor, A Grammatical Analysis of the Greek New Testament (Rome: Biblical Institute Press, 1974), 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