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716 청지기의 삶 – 눅 12:32-40
요즈음 많이 더우시죠?
오늘이 ‘입추’라는데 오늘도 역시 많이 덥네요.
엄청난 무더위라고 연일 보도가 되고 있고
일부 지역에서는 무더위로 인한 전기 소요로 정전까지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더운 것보다 더 힘든 것은 좀처럼 맞아떨어지지 않는 일기 예보가 아닐까 합니다.
장마비가 온다고 해서 우산을 들고 나갔는데 해만 쨍쨍하다든지,
그저 맑고 더울 것으로 생각하고 나갔는데 소나기가 쏟아져서 낭패를 본다든지 하는 것처럼 말이죠.
덥다면 언제 얼마나 더울 것인지, 비가 온다면 언제 얼마나 올 것인지, 춥다면 언제 얼마나 추울 것인지
비교적 정확하게 알려주길 바라는 것이 사람들의 공통적인 마음일 텐데 말이죠.
기독교 신앙 가운데에서도 어쩌면 일기예보보다 더 맞히기 힘든, 아니 도저히 맞출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우리 주님 다시 오시는 정확한 날과 시간 입니다.
여태껏 성경에 예언되었던 많은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고 이것이 역사적으로, 과학적으로 증명되었지요.
그래서 여러 사람들이 이런 저런 근거들을 가지고 예수께서 오시는 날을 맞춰보려고 하는데 지금까지 다 틀렸어요.
심지어는 언제 온다고 추측하며 극단적인 종말론을 주장하다가 이단으로 빠지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그 날은 예수님 자신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 하나님만 안다고 하셨으니까 우리가 알 방법은 사실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 하늘로 올라가신 그 모습 그대로 이 땅에 분명히 다시 오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1장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행 1:9-11)
이렇게 약속을 기다리는 신앙을 우리는 아브라함을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75세 노인을 갑자기 부르시더니 아비 집을 떠나라는 거에요.
그의 자녀를 통해 많은 민족과 족속을 일으키고 복 주시겠다고요.
당시 자녀가 없던 아브라함은 참 놀랍기도 하면서도 자신을 놀리는 것은 아닌지 황당함도 있었을 거에요.
도저히 안 믿어졌는지 자신의 종 엘리에셀을 자녀 삼겠으니 그를 통해 축복하시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야훼 하나님께서는 그 종이 아닌, 분명히 아브라함의 씨를 통해 민족을 일으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이를 믿었다고 합니다.
모름지기 아브라함이 그 약속을 받고 기다리는 심정이 마치 지금 다시 오실 예수를 기다리는 우리의 심정 같지 않았을까요?
당최 언제일지 알 수 없는 그 심정 말입니다.
그런데 오실 때는 도둑같이 느닷없이, 별안간, 갑자기 오신 다는 거에요.
39절 말씀 같이 읽어볼까요?
동일한 말씀을 다룬 마태복음 24장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마 24:42-44)
주께서 그렇게 오실 때에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그 주님을 맞이해야 할까요?
35-36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실까요?
혼인 잔치에 갔다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과 같이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어떤 물리적인, 다시 말해, 문자 그대로 잠도 자지 말고 지키고 있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저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모습을 그 앞, 32-34절에서부터 발견하였습니다.
먼저 32절에서 위로의 말씀을 주십니다.
아버지께서 그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고 하세요.
우리는 그 나라에 대해 의심할 필요도,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 약속대로 우리에게 허락되었음을 믿고 그 나라의 삶을 소망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먼저 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33절 말씀대로, 우리의 소유를 팔아 구제하는 일입니다.
이 구제는 낡아지지 않는 배낭을 만드는 일이요, 마르지 않는 하늘의 보화를 쌓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34절입니다.
같이 읽어보실까요?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참, 어려운, 그러나 이해가 되는 말씀입니다.
생각해 보시지요.
흔히 싱거운 소리로 ‘우리 집에 금송아지 있다’고 하죠.
그런데 정말로 여러분의 장롱에 황금송아지가 있다고 하면,
온통 마음이 그 장롱에 가 있지 않겠어요?
손님이 온다고만 하면 그 황금송아지 숨기느라 애를 쓰겠지요.
혹시 어린 아이라도 집에 있으면 그 녀석 손에 안 닿게 하려고 얼마나 노심초사할까요?
마찬가지 입니다.
재물이라는 것이 참 오묘해서 우리 삶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그 재물에 대한 탐심이 생기기 시작하면 그 재물은 어떤 것보다 위대한 신이 됩니다.
예로, 돈을 벌기 위해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는 이들도 있고
다른 사람의 안전이나 목숨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고 내 주머니만 채우면 그만인 사람들도 있고
저번 주 본문에 등장했던 부자처럼 그렇게 번 돈으로 평생 떵떵거리며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겠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허무하디 허무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인생인데 그 짧은 인생 동안 그저 돈 많이 벌겠다고 말 못할 애를 써요.
이 짧은 인생 돈 버느라 마음 다 빼앗기고 나면 예수는 언제 생각하게 되나요?
하나님 나라는 언제 생각하게 되죠?
생각 못하는 거죠.
감히 말씀 드리기는, 아무리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고 그의 제자라고 말하더라도,
재물에 마음을 빼앗기기 시작하면 우리의 삶은 하나님 나라와 멀어질 뿐이에요.
지난 주 읽었던 골로새서 말씀에서도 지적하지 않습니까?
탐심은 곧 우상숭배 라고 말이죠.
왜요?
우리는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을 다해 주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데 탐심으로 재물을 더 좋아하고 있다면 이것이 곧 우상숭배 아니겠습니까?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하신 제 1계명을 어기는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그 탐심이라는 우상숭배, 곧 재물로부터 우리의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창고를 더 크게 지어서 내 소유를 쌓아놓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것을 팔아 주님 원하시는 곳,
다시 말해, 소외 당하는 자들, 어려움에 빠진 자들, 나그네 된 자들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청지기의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42절을 보세요.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를 찾아 양식을 맡기시려고 하는데 만약 우리 마음에 탐심이 가득하여 그 양식을 내 소유로 삼으려 한다면 과연 주님 다시 오셨을 때 우리를 칭찬하시겠습니까?
45-47절을 읽어보시겠습니다.
아니, 내가 열심히 벌어서 모은 돈을 왜 남에게 써야 합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저는 감히 이렇게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만약 오늘 밤 이 세상을 떠난다면,
오늘 본문의 주님 말씀처럼,
그 동안 소유를 팔아 구제했던 사람은 낡아지지 않는 배낭을 준비하여 거기에 쌓아둔 하늘 보화를 찾는 기쁨을 누리겠지만,
내 주머니에만 넣어놨던 사람은 헛되고 헛되니 헛되고 헛되도다 라고 말하지 않을까요?
그럼 도대체 내 소유의 얼마를 팔아 구제해야 합니까?
만약 여러분의 소유가 여러분의 마음을 잠식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올바르게 사용되고 있다면, 더 이상의 판단은 여러분에게 맡기겠습니다.
다만, 이 한마음교회라는 공동체의 입장에서 이런 구상을 해 보았습니다.
우리 교회가 이웃과 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는 교회가 되길 바라고 있는데
오늘 말씀과 같이 교회 창고에 잔뜩 쌓아 놓는 것이 아니라 재정의 일부를 그 이웃들을 위해 쓰고자 합니다.
그래서 성탄절, 부활절, 감사절 등의 절기 헌금을 소외된 이웃의 필요를 위해 흘려 보낼까 합니다.
자세한 것은 다음 직원회 때 여러분의 의견을 물으며 함께 결정하겠습니다.
자, 어쨌든, 주님 오시기를 기다리는 종은 재물에 매여있지 않아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있는 종의 모습은 결코 많은 재산을 지키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언제든지 주인이 부르면 달려나갈 수 있는 그런 최소한의 복장과 준비만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군대에는 5분 대기조라는 것이 있습니다.
위급상황 발생 시 적절한 초동 대처를 위해 신속하게 출동할 수 있는 부대 단위를 일컫습니다.
이들은 잠을 잘 때로 군복도, 군화도 벗지 않아요.
그렇게 있다가 갑자기 사이렌이 울리면 밖으로 뛰쳐나갑니다.
그리고 5분이 채 지나기 전 현장으로 출동합니다.
우리의 모습이 이와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
즉 주의 제자가 되어
주님과 한 마음이 되고
온 성도가 또한 그 마음을 품어 교회를 건강하게 세우고
그 마음으로 이웃을 섬기면서 하나님 나라와 영광을 꿈꾸기 위해
우리 마음에 세상 염려나 재물에 대한 탐심은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청지기의 삶을 너무 어려워하거나 부담스러워만 하지 마십시오.
여기 주의 놀라운 위로가 있습니다.
37절을 보실까요?
주인이 오셨을 때 그 종들이 깨어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면 복 주시는데
그 주인이 오히려 그 허리에 수건을 띠고 종들을 자리에 앉게 하셔서 수종을 들어주신다는 겁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다가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전율이 올 정도였어요.
남들처럼 떵떵거리면서 살지도 못하고 그마저도 있는 것도 주께서 주라고 하시니까 줘요.
억울하고 힘들어도 복음대로 살려고 말씀대로 살려고 그렇게 애를 쓰고 사니까
나중에 주께서 오셔서 위로해 주시는데
여러분을 자리에 앉히시고 여러분의 발을 닦아 주시는 거에요.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청지기의 삶이, 종의 삶이 힘들고 어려울 수 있어요.
마지막 시대에 말씀 위에 바로 서기 위해 누구보다 지혜로워야 하고 절제하며 살아야 하고 인내하며 살아야 해요.
하지만 주께서 이것을 다 알고 갚아주십니다.
이런 주의 위로와 소망을 간직하시면서
마지막 때에 주인을 기다리는 종으로 성실하게 그리고 지혜롭게 깨어 있으시길 바랍니다.
주님 말씀하십니다.
“40.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