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1416 하나님 나라를 위한 분쟁 – 눅12:49-56
사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을 그저 대강 본다면 이렇게 모순적인 말씀도 없을 겁니다.
분명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실 것을 예언하면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사 9:6)
라 하였고,
예수께서 태어나실 때 천사들이 목자들 앞에서 찬양하기를,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눅 2:14)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나는 이 땅에 분쟁을 주러 왔다’ (51절)고 선언하십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서 우리의 마음을 더 어렵게 만드는 것이 바로 52-53절 말씀처럼 가족들끼리도 분쟁한다는 거에요.
심지어 21:16절에서는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 주어 너희 중의 몇을 죽이게 하겠고” 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따져 보기 앞서 분쟁의 뜻이 무엇인지 먼저 생각해 보겠습니다.
분쟁이란 내가 알고 있는 그 중요한 것을 말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동의 혹은 합의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곧 다른 사람들과의 분리 혹은 구별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무엇 때문에 가족 내에서조차 이런 분쟁이 일어날 것이라 하셨을까요?
바로 예수 자신 때문입니다.
1-2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불을 던지러 왔다고 하시면서도
불이 이미 붙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셨어요.
곧 불이 와서 심판할 것은 심판하고 새롭게 할 것은 새롭게 해야 하는데 자신이 그렇게 불로 살라져야 함을 아셨어요.
또한 당신이 받을 세례가 있었는데 답답할 정도로 받기 싫어하셨어요.
이것들은 모두 그의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예수께서는 그렇게 십자가를 지셨어요.
저와 여러분을 위해.
하나님이 자신이 창조주요, 구원자 임을 보여주고 들려줘도
여전히 내 것만 옳다고 하고,
내 주장만 옳다고 하고
나를 창조하신 분을 섬기는 대신,
내 돈을 사랑하고 내 안전을 사랑하고 내 품위를 사랑하고 사람이 깎아 만든 우상을 사랑하는
끊임없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죄를 짓고 있는 우리를 위해
예수는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어요.
너무나 하기 싫었지만 자신이 스스로 심판의 불이 되어 모든 죽음의 죄를 책임지고 십자가에 달리셨어요.
그가 십자가에서 자신의 살을 찢고 피를 흘리시면서
여러분과 저의 죄를 용서하시고 다 이루었다 말씀하셨습니다
그 순간 저 악한 마귀의 권세는 영원히 꺾였고 온 땅의 권세도 무너졌어요.
삼 일간 죽은 채로 땅 속에 있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 죽음의 세례를 통해 예수 이름을 믿는 모든 자에게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소망을 주셨어요.
어떻습니까 여러분.
예수는 자신의 목숨 값으로 우리를 영원한 죽음에서 영원한 소망으로 옮기셨는데
여러분은 그 예수를 위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그런데 그가 무엇보다 바라시는 것은 예수를 위해 그 어떤 위대한 일을 하는 것보다 자신을 사랑하며 따르는 제자가 되길 원하세요.
"누구든지 내게로 오는 사람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나 자식이나, 형제나 자매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눅 14:26-27, 새번역)
세상 그 어느 것보다, 심지어 자기 목숨보다 예수를 사랑하려면, 그리고 그의 가르침을 따르려면 당연히 분쟁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다시 말해, 내가 예수보다 더 사랑하던 것에서 갈라져 나오려면 분쟁하게 됩니다.
설사 그것이 가족이라도 말이죠.
그러나 여기에서 끝난다면, 우리는 나만 옳고 너는 틀리다는 고집스러운 종교인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예수의 이름으로 한다고 해도 우리의 분쟁이 나만 옳고 너는 틀리다 라고 정죄만 하고 끝나서는 안됩니다.
이 분쟁을 통해 당신도 예수께로 함께 가자 해야죠.
제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만 잠깐 제 조부님에 관한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내일이 71주년 광복절인데요,
제 할아버지는 어릴 적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로 피하셨다가 해방 후 돌아오셔서 강원도 횡성에 자리를 잡으셨습니다.
제 증조 할아버지께서는 그 곳에서 서당을 여시고 학생을 가르치셨다고 해요.
평안한 것만 같던 집안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한 것은 제 어머니가 그 집 며느리로 시집 가면서부터 입니다.
큰 아들이었던 제 할아버지는 제사를 목숨처럼 여기셨는데 제 어머니는 이 제사가 조상이 아닌 귀신을 섬기는 일이요,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반하는 일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하셨어요.
실제로 제 어머니는 제사상에 조상이 아닌 도깨비 귀신이 와서 음식을 헤집고 다니는 소리를 들으셨다고 해요.
내 가족이 더러운 귀신이 밟고 다닌 음식을 먹는다고 생각하니 아찔하잖아요.
그래서 제 어머니는 결혼하면서부터 분쟁을 시작했습니다.
제 어렸을 때 기억에도
명절 때마다 한 쪽에서는 제사장을 차리고 술을 따르고
다른 한 쪽에서는 이러면 안 된다고 말리는 모습이 생각납니다.
며느리 잘못 들어왔다고 어른들이 화도 많이 내셨고
예수 믿더니 미쳤다고 혀 차는 소리도 많이 들으셨어요.
그렇게 7년 분쟁 끝에 제 할아버지는 제사상을 접으셨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직분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만 집사 직분도 받으셨고요.
그렇게 여생을 사시다가 81세에 폐암으로 돌아가셨는데요,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 할아버지께서 제 부모님을 급하게 찾으신다기에 가셨어요.
그 때 할아버지께서 제 아버지의 손을 꼭 잡으면서 그런 말씀을 하셨답니다.
“조 목사, 고마워! 나 예수 믿게 해 줘서 고마워!”
그러면서 가장 좋아하신다는 찬양, ‘주와 같이 길 가는 것’을 함께 불렀다고 합니다.
‘주와 같이 길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우리 주님 걸어가신 발자취를 밟겠네
한 걸음 한 걸음 주 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는 걷겠네’
그렇게 일주일 후 할아버지께서는 평안한 모습으로 숨을 거두셨습니다.
전통과 관습대로라면 제 어머니의 분쟁이 참 어처구니 없고 말도 안 되는 처사였지만,
그 분쟁으로 인해 제 할아버지는 그 무엇보다 소중한 예수를 얻으셨어요.
우리 분쟁의 결국은 함께 저 천국을 소망하자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함께 살자는 것이에요.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께 함께 가자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설령 가족이라 할지라도 우리를 예수로부터 멀어지게 한다면 그것에서 우리는 구별되도록 분쟁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분쟁의 과정은 인격적인 무시나 과격함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향한 동행이어야 합니다.
힘내십시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니 예수께서 또한 지키실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빌 4: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