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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2816 겸손, 역설 – 눅 14:1, 7-14


여러분, 역설의 의미를 아십니까?

한 국어 사전에 의하면, “1. 어떤 주의나 주장에 반대되는 이론이나 말.” 또는 “2. 모순을 일으키기는 하지만 그 속에 중요한 진리가 함축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역설이라고 합니다.[1]

조금 어렵죠?

쉬운 예를 들어볼까요?

상식적으로 우리는 건강하게 오래 살려면 살을 빼라고 합니다.

그런데 2014년 5월에 방영되었던 SBS 스페셜 ‘비만의 역설’ 에서는 뚱뚱한 사람이 오히려 장수하고 건강할 수 있다는 주장이 소개되었습니다.

방송을 소개한 기사의 내용을 일부 소개해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날 방송에서는 심근경색으로 중환자실에 입원한 50대 두 남자가 나왔다. 한 남자는 마른 몸의 체형이고 다른 한 남자는 뚱뚱한 체형이다. 얼마 후 뚱뚱한 체형의 남자는 몸 상태가 호전되어 퇴원했고 마른 체형의 남자는 끝내 사망했다… 취재진이 스트레스와 체형에 대한 실험을 진행한 결과 스트레스 상황에서 마른 사람들이 훨씬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마른 사람이 스트레스 호르몬의 부작용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비만 연구가들은 비만인들이 병에 잘 걸리는 한 이유로 다이어트 부작용을 들었다. 즉 비만 그 자체에는 잘못이 없다는 것. 이날 SBS 스페셜은 비만이 알려진대로 만병의 근원이 아니며 오히려 장수와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를 제시하며 사회적 편견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해 눈길을 끌었다.”[2]

이제 다이어트 때문에 스트레스 받으시던 분들은 그 압박에서 조금 자유로우시길 바라봅니다.

또 어떤 역설들이 있을까요?

종이 없이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컴퓨터가 개발되었지만 오히려 종이를 더 많이 쓰게 되었습니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컴퓨터와 로봇이 일을 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일자리가 줄어듭니다.

또한, 다같이 잘 살자고 개발하고 발전을 할수록 빈부격차가 커지고 못 사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더 못살게 되는 것이 우리 시대의 큰 역설 중 하나일 것입니다.

무엇보다 기상청 야유회 가는데 비가 왔다는 것은 아주 기가 막힌 역설입니다.

사실 역설을 이야기하자면, 신앙만큼 역설적인 것이 있을까요?

역설의 의미를 찾다 보니까 아주 좋은 글귀를 예로 들어놓았더군요.

“신앙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이성으로는 믿기 어려운 역설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안병욱, 사색인의 향연

그 신앙의 역설 중에서도 오늘 본문에서 주께서 말씀하신 겸손에 관한 것은 역설 중의 역설이라 할 만합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11절 말씀대로,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엄청난 역설이지요.

하지만 요즈음 같은 무한경쟁 시대에 문자 그대로 자기를 낮춘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어디에서든 누구를 만나든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애쓰지 않습니까?

또 다른 사람을 만나거나 모임에 참석할 때 나의 사회적 지위나 명예에 맞는 혹은 그 이상의 자리에 앉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기도 하는데,

오늘 말씀에서는 높아지려는 자가 오히려 낮아지라고 하세요.

곧 우리가 생각하는 겸손에 대한 정의와 주님의 정의가 다를 수 있다고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이야기를 누구에게, 왜 하셨을까요?

본문 1절은 오늘 이야기의 배경을 말해줍니다.

예수께서는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초대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식사 하시는 상황이 그렇게 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식사하시는 것을 엿보는 자들이 있었거든요.

그들은 3절과 7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이었는데요,

그들이 엿본 것은 어감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예수가 하나라도 잘못하는 게 있으면 그걸 빌미 삼아 고발하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눅 11:53-54, 20:20 등에서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하려고 엿본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예수님의 말씀, 즉 지금 높아지려는 자는 낮아지라는 말씀을 누구에게 하신 것입니까?

예수 주변에서 예수를 엿보고 있던 자들,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이에요.

이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은 백성들의 종교지도자들로써 여러 자리에 초청받을 일이 많았을 거에요.

그런데 문제는 자신들이 지도자들이라는 인식이 있었기에 좀처럼 겸손한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다는 것이지요.

아닌 게 아니라, 7절을 보시면,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말씀하여 이르시되” 라고 하면서 그들의 겸손하지 못한 모습을 지적하십니다.

여기에서 높은 자리란 위치적으로 높은 것이라기 보다 명예로운 자리, 즉 잔치를 연 사람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는 것을 말합니다.[3]

즉, 잔치를 연 사람의 바로 옆에 앉음으로써 마치 자신을 위해 잔치를 연듯한, 자신이 굉장히 명예로운 사람임을 드러내고 자랑할 수 있는 기회를 삼았다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예수님 말씀이,

그렇게 높은 자리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더 높은 사람이 온다면 끝자리로 밀려나는 수모를 당할 수 있다는 거에요.

그럴 바에야 차라리 끝에 앉아 있다가 ‘어서 위로 올라오십시오’ 라는 소리를 들으면 더 명예롭지 않겠냐 하십니다.

이것이 곧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는 역설의 원리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해하면 안될 것은,

자신을 높은 자리로 불러주길 바라면서 끝자리에 앉아있다면 이것은 철저한 계산에 의한 거짓 겸손이겠지요.

이렇듯 예수께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신 겸손은 단순히 자리 배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겸손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기 전 예수께서 한 병자를 고치시는 사건이 등장하는데요,

예수께서 식사를 하시러 간 그 집에서 수종병 든 사람을 보십니다.

수종병은 부종 혹은 고창병이라고도 하고요, 몸의 특정 부위 혹은 전체에 물이 차서 붓는 증상을 말합니다.

몸을 붓게 하는 원인은 심장, 신장, 폐, 간 등 내부 기관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다만 오늘 본문에서는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가 왜 이 식사 자리에 있었는지도 불분명합니다.

단지 본문의 정황상 정식으로 초대받은 사람 같지는 않습니다.

조사에 따르면, “당시 유대인들은 이 병이 죄로부터 온 것이며, 하나님의 저주의 결과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4]

당연히 율법학자들과 유대인들의 식사 자리에 죄인이라 여기는 병자를 초대하지 않았겠지요.

중요한 것은 그가 병으로 고통 받고 있었고 지금 예수 앞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병든 사람을 보고 예수께서 말씀을 하시는데 조금 이상한 것은 3절에 보시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라고 하는 것입니다.

1-2절에서 이 병든 사람에 대해 혹은 이 병든 사람이 예수께서 질문 한 것이 없거든요.

예수께서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 ‘안식일에 병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라는 것을 통해 우리는 지난 주 말씀, 안식일에 귀신들려 허리가 굽었던 여인을 고치셨던 사건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시던 예수께서 회당에 18년 동안 귀신들려 허리가 굽어 고통 당하던 여인을 주목하셨고 그 여인을 안수하여 고치셨죠.

하지만 회당장이 안식일에 병을 고친다 하여 분을 내었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13:15-16 입니다.

함께 읽어보실까요?

자, 이제 오늘 본문 3-5절을 보시죠.

같이 읽어보실까요?

말 그대로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3절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라는 말은 이미 예수를 엿보고 있던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또 병자를 고치나 안 고치나 시비를 걸고 있었고 또 고치실 거냐고 물어왔던 것으로 해석하기 충분합니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예수께서는 수종병 든 사람을 고치시고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의 코를 납작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서는 겸손에 대해 말씀하신 거예요.

그러나 아직도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것과 겸손에 대해 말씀하신 것과 어떻게 연결이 되는 것인지 애매모호합니다.

그런데 본문 12-14절에서 두 이야기의 연결 고리를 제공합니다.

같이 읽어보실까요?

자, 예수께서 참석하신 이 식사 자리를 한 번 그려볼까요?

바리새인의 지도자라는 자가 예수를 초청했어요.

그리고 그 자리에는 수 많은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이 있었습니다.

식사를 준비하여 사람들을 초청한 사람부터

그 식사에 참여한 사람들까지 그들은 모두 소위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12절 말씀대로 그들은 모두 “부한 이웃”들 뿐이었어요.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13절 말씀대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입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초청된 사람들은 서로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어깨에 힘 주는 사람들일 뿐이지 정말 밥 한끼가 소중한 사람들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지난 주에도 말씀 나누었지만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것은 소위 율법이라 하는 규제나 규칙보다 소외되고 외면 받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그 마음인데,

자신들은 높은 자리에 앉아 식사하기를 원하면서 정작 수종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은 예수를 시험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할 뿐이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그들은 나면서부터 대단한 나라의, 대단한 민족이었습니까?

오히려 그들은 정말 소수 민족과 같은 자들이었고 그마저도 이집트 땅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자들 아닙니까?

한 마디로 소외되고 외면 받던 자들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어요.

주께서 끊임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신 24:22)” 고 하시면서 나그네들과 소외된 자들을 돌아볼 것을 말씀하시지만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그저 높은 자리에 앉기만을 바랐다는 거지요.

그렇다면 오늘의 말씀을 이렇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시는 겸손은 개인의 덕목을 넘어서서

소외된 자들, 외면 받는 자들을 돌아보려면

결국 내가 낮은 자리로 가야 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나 역시 소외된 자일 수 있고

나그네인 인생임을 생각하며 겸손해 지지 않으면서

소외된 자들을 돌아본다는 것이 역설 아니겠습니까?

아까 읽으신 히브리서 말씀 기억하십니까?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히 13:1-2, 16)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은 곧 소외되고 외면 받고 억눌린 자들을 사랑으로 돌아보는 일이라고 하시는데

이를 위해서 우리는 높은 자리가 아닌 낮은 자리로 향해야 합니다.

14절 말씀대로 그 과정에서 생기는 손해나 억울함은 주께서 다 채워주십니다.

“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

아멘.

[1] http://krdic.naver.com/detail.nhn?docid=26753500

[2] http://www.asiae.co.kr/news/view.htm?sec=ent99&idxno=2014052609132934762

[3] Biblical Studies Press, The NET Bible First Edition Notes (Biblical Studies Press, 2006), Lk 14:7.

[4] 카리스 종합 주석, 누가복음 9-16장, 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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