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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116 바꿀 수 없는 가치 – 눅 15:1-10


여러분 영화 ‘터널’ 보셨어요?

여기 짧은 소개 영상이 있습니다.

뒤에 불 좀 잠깐 꺼주시겠습니까?

어떠세요? 보고 싶은 마음이 드시나요?

이 영화는 이 영상 중간에도 자막으로 나왔습니다만 터널만 무너진 것이 아니고 사람들의 안전의식과 생명에 대한 마음까지 다 무너졌다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주인공을 쉽게 구해내지 못하자 사람들은 곧 경계적 손실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거든요.

얼마 전 한 시장이 세월호 피해자를 애도하는 노란 리본을 달고 나타났더니 그 모습을 본 한 아주머니가 지겹다고 그만 좀 하라고 소리쳤다고도 하는데요,

누가 잘했고 못했고를 떠나서 그저 생명을 경시하는 한국 사회의 민 낯을 영화건 현실에서건 쉽게 보게 됩니다.

이제 여러분께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속으로만 대답해 주셔도 됩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 터널에 갇힌 주인공이 되었다고 상상해 보시지요.

과연 여러분은 모든 손실을 감수하고라도 구출해낼 가치가 있는 사람입니까?

무너진 터널 밖에 있는 사람들은 여러분을 구하기 위해 얼만큼의 노력을 들일까요?

이 질문들을 잊지 말고 계십시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복음서의 이야기에도 생명을 가볍게 여기고 사람을 업신여기는 모습이 드러납니다.

요즈음이야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생명 경시 풍조가 만연하다고들 합니다만,

오늘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경제적인 것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의 행위, 직업, 그리고 출신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 공공연한 혹은 암묵적인 차별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특히 종교 지도자들이라 하는 자들이 자신들만의 울타리를 정해놓고 거기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은 죄인으로까지 불렀으니 말 다했지요.

가령 오늘 말씀 처음에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까?

세리 입니다.

이들은 세금을 걷는 사람들이었으니까요 지금으로 말하면 세무서 직원들 정도로 생각하시며 되겠습니다.

종교 지도자들, 즉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보기에 이 세리들은 아주 죄인 중의 죄인들이었습니다.

첫째는 그들이 돈을 다루기 때문이었고

둘째는 그들이 당시 이스라엘을 식민지배하던 로마에 충성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로마 정부가 세금으로 걷으라고 한 금액보다 높은 금액을 부과하여 중간에서 가로챘다고 합니다.

결국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세리들은 배신자였을 것이고, 죄인 취급”을 당했을 것입니다.[1]

그런데 그런 죄인들과 예수께서 지금 같이 식사하며 말씀을 가르치며 교제하고 계시니까 종교 지도자들의 눈이 뒤집어 진 거에요.

예수가 죄인들을 영접하고 같이 밥 먹는다고 수군수군합니다.

여기에서 영접이라는 말은 받아들인다는 뜻 입니다.

조금 거친 말로 표현하자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보기에 이 세리들은 말씀을 받을 자격도 없는 자들이고 지금 당장 천벌을 받아 죽어야 할 존재들이에요.

그런데 그런 자들을 받아들여서 함께 식사를 한다니요?

그들은 예수의 이런 행동을 도저히 용납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께서 비유를 들어 설명해 주십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잃어버린 양에 대한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기르는데 그 중에 하나가 없어진 거에요.

다 자란 양 한 마리가 대략 100만원을 조금 웃돈다고 하니까요, 백 마리를 기르는 사람이라면 꽤 부유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 당시에도 그랬습니다.[2]

그런데 그 100 마리 중 한 마리를 잃어버린 거에요.

어쩌다 한 마리가 없어졌는지 알 턱이 없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그 다음에 목자의 태도입니다.

잃어버리지 않은 99 마리의 양은 그대로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아 나섭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시지요.

99마리를 그냥 놔뒀다가 그마저도 잃어버리든지,

다른 짐승에게 잡아 먹힐 수도 있지 않습니까?

상식적으로나 경제적인 논리로나 이 나머지 99마리라도 잘 지키는 게 맞지 않습니까?

하지만 나머지 양은 어찌되든 상관없다는 듯이 잃은 양을 찾아낼 때까지 찾아 다닌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다행히도 잃은 양을 찾아서 즐겁게 어깨에 메고 옵니다.

자료에 의하면, 겁 먹은 짐승을 잘못 들면 바둥거리다가 등으로 떨어질 위험이 있다고 하더군요.[3]

그래서 모양이 조금 웃기긴 합니다만 양의 안전을 생각해서 두 발을 잡아 어깨에 메고 오는 거죠.

여기 저기 헤매고 다니느라 땀과 떼에 얼룩진 꾀죄죄한, 그러나 웃음꽃이 핀 목동의 모습을 잠시 떠올려 보시지요.

그렇게 집에 돌아온 후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모습니다.

잃은 양을 찾았다며 잔치를 벌입니다.

하루 종일 양을 찾으러 산으로 들로 돌아다녀서 피곤할 텐데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잔치의 규모는 가늠할 길이 없지만 잔치를 벌이기 위해 별도의 수고와 돈이 들어갔을 것 아닙니까?

나머지 99마리라도 잘 간수하고 있었다면 한 마리를 찾으러 다니러 수고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잔치를 한다고 돈을 쓸 필요도 없었을 거에요.

상식적으로는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이 장면을,

예수께서는 천국의 모습이라고 표현하십니다.

7절 말씀 다같이 읽어볼까요?

잃은 양 하나가 돌아오면 남아 있던 99마리가 잘하고 있던 것보다 기뻐한다는 겁니다.

마치 주인이 자신의 피곤함이나 별도의 돈이 들어가는 것은 상관없이 친구들과 이웃들을 초청해 잔치를 벌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이번엔 한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그녀에게 열 드라크마가 있었습니다.

이 드라크마는 당시의 좋은 조건으로 거래되던 은 동전인데요,[4]

당시 한 드라크마가 데나리온과 비슷한 값어치, 즉 노동자 하루 품삯의 값어치가 있었다고 합니다.

계산하기 나름이긴 합니다만,

최저 시급 6,030원으로 따진다면, 8시간을 일하고 받는 금액, 약 5만원이 조금 안 되는 금액입니다.

어쨌든 열 드라크마가 있었는데 그 중의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렸습니다.

여인은 하나가 없어진 것을 알고 온 집을 찾아 헤매기 시작합니다.

물론 현재 5만원이 결코 적은 액수의 값어치는 아닙니다만 만사를 제쳐두고 찾아야 할 상황이라면 그녀에게 이 한 드라크마가 매우 큰 값어치였음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자료에 의하면, 이것이 신부의 지참금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조심스레 추측합니다.[5]

또 어떤 학자는 이 열 드라크마가 가정 비상금이었을지도 모르고, 성지순례를 위한 준비금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6]

이런 가정들이 사실이라면 잃어버린 은전은 꼭 찾아야 하는 것이겠지요.

당시 집은 크고 작은 현무암 벽돌로 건축되는 경우가 많아서 바닥 역시 고르지 않고 홈도 많았다고 합니다.[7]

그러니까 돌 사이에 빠진 동전 하나를 찾으려면 얼마나 수고를 해야 하겠습니까?

온 집안을 환히 밝히고 조심스레 쓸어가며 동전을 찾겠지요.

결국 여인은 동전을 찾아냅니다.

그리고 앞의 이야기와 동일하게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서 잔치를 엽니다.

이 부분에서 역시 우리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됩니다.

5만원 찾았다고 잔치를 열면 이 5만원은 찾으나 마나 아닙니까?

아무리 빵과 우유만 먹는다고 해도 여럿이 같이 먹으려면 5만원 우습게 없어지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앞에서 말씀 드린 가정대로 정말 중요한 일을 위해 모아놓았던 은전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식에서 머물지 않고 이 여인은 은전을 찾았다고 기뻐하며 친구들과 이웃들과 함께 잔치를 벌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상식을 넘어서는 기쁨의 현장이 또한 바로 천국의 모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0절을 같이 읽어보실까요?

여러분, 이 두 이야기를 어떻게 들으셨습니까?

결국 예수께서 말씀하시고자 했던 것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죄인이라고 무시하고 사람취급도 안하는 이 세리들이 곧 잃은 한 마리의 양이요 잃었던 한 드라크마인데 그들을 찾은 기쁨이 매우 크다는 것입니다.

두 이야기에 등장하는 목동과 여인은 소중하게 여기는 하나를 찾기 위해 엄청난 수고와 노력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찾은 다음에는 비상식적으로 잔치를 열면서까지 기뻐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머리로는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해도 실익을 따지는 요즘 사람들의 모습과는 사뭇 다릅니다.

아까 소개해드린 영화 터널에서도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데 집중하기 보다 그 사람을 구하기 위해 멈춘 건설 현장의 경제적 손실을 따지는 모습에서 부끄럽지만 저의 모습을 보았고 이 사회의 단면을 보았습니다.

그럼 아까 드렸던 질문을 다시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가장 고귀하다는 인간의 생명조차 경제적인 논리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취급 받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러분,

여러분은 과연 모든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찾아내고 구출해줘야 할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과연 다른 누구의 희생이 있더라도 반드시 찾아내야 할 가치가 있습니까?

여러분을 찾아낸 후에 비상식적일 정도로 기뻐하고 잔치를 벌여줄 사람이 있습니까?

세상 사람 모두가 아니라고 해도,

하는 일마다 실패하고 주위에 폐만 끼친다고 악담을 들어도,

구질구질하여 어쩔 수 없는 낙오자 같은 인생이라고 해도,

설사 부모가 너는 실수로 낳았어 라고 저주를 했어도,

안 찾아도 그만인 것 같은 인생이라도,

그런 우리를 찾고 부르시는 분이 계세요.

자신의 몸이 찢어지고

머리에서부터 쏟아지는 피가 땅을 적시고

온갖 조롱과 비웃음을 들어도 반드시 우리를 구출해내기 위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분,

찾고 찾아서 끝내 찾아내는 분,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세상 모두가 아니라고 해도 우리 하나님께 여러분 한 분 한 분은 반드시 구원해야 내야 할 사랑하는 그의 자녀입니다.

반드시 회복시켜서 천국백성으로 삼고자 하시는 그의 보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돌아올 때 천국에서는 잔치가 벌어지는 거에요.

그리고 이미 이 사실을 알고 그렇게 믿는 분들이 계시다면,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원하실 때 얼마나 기뻐하셨고 즐거워하셨는지 아신다면,

그 자리에 머물러 계시지 마시고 하나님과 함께 다른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해 일어나시길 간곡히 부탁 드립니다.

잃어버린 그 양 한 마리가 어느 계곡에서 길을 잃어 구슬프고 울고 있을지,

귀한 은전 하나가 어느 바위 틈에 끼어서 먼지만 쌓여가고 있는지,

이제 우리가 일어나 찾아야 할 때란 말씀입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 예수가 저주의 나무에서 생으로 찢겨 죽는 것을 보시면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고 나를 찾아내어 구원하시고 회복시키셨던 것처럼

다른 이들도 그렇게 찾아내어 구원하시고 회복시키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이 잃은 양의 모습인지,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의 양의 모습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인지, 여전히 여인의 주머니에 있는 9개의 드라크마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우리의 참 목자 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끝끝내 찾아내어 천국 백성 삼으시고 온 천국 백성으로 하여금 함께 기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사랑의 주님을 찬양합니다.

[1] John D. Barry et al., Faithlife Study Bible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12, 2016), Mt 5:46.

[2] 윤철원, 415; J. Nolland, Luke 9:21-18:34 (Word Books, 1993), 771.

[3] Ibid., 772.

[4] Ibid., 775.

[5] 윤철원, 416.

[6] Nolland, 775.

[7] 위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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