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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316 세리의 기도와 믿음 – 눅 18:9-14


오늘은 조금 낯 뜨거운 이야기로 시작하려 합니다.

지난 17일 월요일 KBS2 ‘제보자들’이라는 프로그램에서 한 여신도와 목사와의 불륜의혹을 제기하였습니다.

한 교회 앞에서 일인시위를 하는 한 남성의 주장을 들어보니 자신의 17살 아들이 담임목사의 아들이며 자신의 부인은 그 목사와 불륜 관계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방송사에서는 결국 유전자 검사를 제안했고 결과는 정말 충격적이게도 아들과 목사와 친부관계가 성립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목사의 반응이었습니다.

일말의 반성의 기미를 보이기는커녕,

자신은 아이를 갖지 못하는 여성도를 위해 기도해 준 것 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이었어요.

개인적으로 불륜 관계를 맺은 적이 없는데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이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기도의 사람이길래 기도만 해 주었는데 그 아들을 잉태케 해 주셨을까요?

저는 우연찮게 재방송으로 이것을 보았는데요, 그 목사의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들었을 때 얼마나 기가 차고 어이가 없는지 자리에서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냥 말을 안 하면 중간이라도 갈 텐데 왜 그렇게 하나님 영광을 가리고 교회를 욕되게 할까요?

겉으로는 거룩한 척, 누구보다 바른 신앙을 가진 척 했지만 그 삶은 엉망진창 아닙니까?

과연 그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요?

제가 뭐라고 감히 사람을 정죄하겠습니까 만은, 적어도 오늘 말씀을 통해서만 보더라도 스스로는 떳떳하고 의롭게 여길지언정, 그 목사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 받기는 글렀다 생각됩니다.

오늘 본문은 기도의 자세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자주 언급되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다시 한 번 꼼꼼히 살펴볼까요?

우선 본문의 개요인 9절에서 몇몇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또” 라는 접속어로 시작합니다.

그럼 지난 주에 다루었던 본문, ‘과부와 불의한 재판관’ 이야기와 비슷한 메시지를 던져 주려 한다는 것을 가늠해 볼 수 있겠지요.

그리고 본문 첫 절에 밝히는 청중은 누구입니까?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 입니다.

분명 기도에 대한 이야기인데 청중이 왜 이렇게 설정되어 있을까 궁금합니다.

일단 상황은 이렇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 올라갑니다.

물론 따로 올라갔습니다.

11절에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는 모습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죄인과 접촉이라도 하면 그 역시 부정하게 된다는 규례를 아주 철저히 지키기 위해 멀리 서 있었겠지요.[1]

아니나 다를까, 이 바리새인의 기도에서는 자신이 부정한 자가 아니라는 자부심이 철철 넘쳐납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남의 것을 빼앗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더구나 이 세리와는 같지 않습니다” (새번역)

여러분, 이 바리새인의 기도에서도 세리가 사회적으로 얼마나 지탄받는 자들이었는지 느껴지시지 않습니까?

그는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기 위해서 이 상대적 죄인인 자신의 옆에 있는 세리를 대놓고 거론합니다.

그리고 따로 기도한다고는 해도 세리를 언급하는 모양에서 그는 주변을 많이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바리새인의 기도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12절을 같이 읽어볼까요?

율법에서는 대속죄일에 하는 금식만을 요구하였습니다.

이 바리새인과 같이 자발적으로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는 경우는 보통 월요일과 목요일에 이뤄졌다고 합니다. [2]

여러분은 지금 이 바리새인의 기도를 보시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윤리적으로나 법적으로는 어떤 문제점도 찾을 수 없어요.

오히려 훌륭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그의 기도가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답은 다음의 나오는 세리의 기도에 있습니다.

당당하고 부끄러울 것이 없던 바리새인과는 달리,

세리는 멀리 서서 하늘을 바라보지도 못한 채 가슴을 치며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저는 오늘 성경의 표현 중 “다만” 이라는 단어가 참 크게 와 닿았습니다.

이 세리는 그 어떤 것도 내세울 게 없어요.

사회적으로는 죄인이라 손가락질 받는 사람이고,

그렇기에 자신이 금식하거나 십일조 한다고 해서 칭찬해 줄 사람도 없고요.

부끄러운 마음에 하늘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해요.

할 수 있는 게 이것 단 하나입니다.

다만 가슴을 치며…

중동 문화에서 남자가 가슴을 치는 행위는 매우 드문 행위라고 합니다.

여자들이 안타까운 일이나 누군가를 애도할 일이 있을 때 가슴을 친다고 합니다만, 남자들이 그럴 경우는 아주 특별한, 예를 들자면, 이라크 시아파 사람들이 사담 후세인의 기일에 맞춰 일년에 한 번 가슴을 치며 우는 것처럼 아주 특별한 경우만 해당된다고 합니다. [3]

그럼 오늘 본문에서 세리가 가슴을 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이 시간이 그에게 있어서는 사회적인 관습이나 부끄러움마저도 이겨낼 정도로 간절한 시간이라는 뜻입니다.

두 사람의 기도에 대해 예수께서 평가하십니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돌아간 자는 바로 이 세리라고 말이죠.

왜일까요?

다시 한 번 두 사람의 기도를 비교해 보겠습니다.

세리는 가슴을 치며 하나님께 자비를 구했어요.

그에게 있어 기도를 듣는 대상은 누구였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어떻습니까?

그의 기도에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한 그 어떤 언급도 없습니다.[4]

하나님이여.. 라고 기도는 시작하는데 하나님께 자비나 은혜를 구하였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증거하였습니까?

그것도 아니라면 자신 이웃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구하였습니까?

1세기 유대교 경전에도 보면 세 가지 기도가 내려온다고 합니다.

죄를 고백하는 기도,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기도,

자신과 타인을 위한 기도.

하지만 그것을 모를 리 없는 이 바리새인의 기도에는 그 어떤 내용도 들어있지 않습니다.

그의 기도에는 오로지 자신의 자랑 밖에 없었어요.

사실, 그의 이런 오만한 기도는 그의 자세에서부터 드러납니다.

한글 번역에는 그저 “서서” 라고 표현되었습니다만, 영어 성경을 보면 “standing by himself” (ESV)/ ‘스스로 서서’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감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힘을 의지하여 서 있는 거에요.

게다가 “기도하여” 라는 표현도 영어성경의 표현을 빌리자면, “prayed to himself” / ‘자신에게 기도하여’ 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그가 기도하려고 서는 이 모든 과정에서, 그리고 실제 그의 기도에서 하나님은 없어요.

어떤 신학자의 지적대로,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에게 기도하는 모습 아니겠습니까?[5]

자기 자신에게 기도한다? 벌써 상식적으로 말이 안 맞습니다.

기도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니까요

“인간보다 능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어떠한 절대적 존재에게 빎. 또는 그런 의식.” (네이버 국어사전) 이라고 정의하고 있더라고요.

그런데 자신에게 기도한다는 성경의 표현대로라면 이 바리새인에게 하나님은 그저 구실일 뿐,

이미 자신의 완벽한 율법적 행위가 자신을 의롭게 했다는,

다시 말해 자신은 이미 초월적인 존재라는 무서운 교만과 자만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교만이 얼마나 무서운 죄입니까?

무서운 죄임에도 불구하고 그 교만에 가리워서 자신의 죄를 바로 보지 못할 뿐입니다.

그래서 한 신학자는 이 말씀을 논하면서, 결국 이 바리새인도 자신은 이들과 다르다고 나열한 죄인들과 똑같거나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나은 사람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6]

한 관주 성경의 해설에서도 이 바리새인을 평하길, 그는 자신의 결핍과 곤궁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7]

우리의 신앙도 혹시 이렇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모임을 갖고 여러 사역을 한다고 하지만,

정작 그 안에 예수의 이름은 없고 나만 드러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정작 예수의 마음은 알지 못한 채 나의 자랑만 늘어놓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이 이야기의 청중은, 즉 자신을 의롭다 하고 다른 이를 멸시하는 자들은 곧… 우리 아니겠습니까?

다시 한 번 세리의 기도 모습을 보시지요.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마주 하고 있다면 감히 어떤 말로 우리를 드러낼 수 있을까요?

이사야 선지자는 주께서 보좌에 앉으신 모습을 보고 단번에 외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사 6:5, 개역개정).

강렬한 태양빛 아래에서도 흠을 숨길 수 없는데, 하물며 영원한 생명의 빛이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피조물인 우리의 연약함과 죄악이 얼마나 잘 드러나겠습니까?

사람이 아무리 잘났다 한들, 그를 지으신 이보다 뛰어나겠으며,

아무리 훌륭한 일을 많이 했다 한들, 온 세상 만물을 움직이고 계시는 하나님의 일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대쪽 같은 삶을 살았다 한들, 하나님의 거룩하심, 그 100% 깨끗하심에 비할 수 있겠냐는 말이죠.

오늘 이야기 속의 세리가 아무리 비난 받는 대표적인 죄인이었다고 한들, 이 세리가 정말 죽을 죄를 지어서 이런 기도를 했을까요?

이 세리는 성전에 올라와 기도하면서 진정 하나님의 임재를 마주한 거에요.

거룩한 성전에서 제사를 흠향하시는 하나님을 뵌 거에요.

그럼 할 것은 단 한 가지! 그 놀라운 빛 앞에 드러난 나의 죄, 그 추악함을 용서해 달라고 엎드리는 수 밖에 없는 거에요.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자비를 구한 이 세리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신 말씀은 곧,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여태껏 기도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결말이 뜬금없어 보인다 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도는 거들 뿐, 오늘 이야기의 진짜 주제는 바로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한 믿음입니다.

자기를 한 없이 높이던 바리새인은 그저 돌아갔어요.

하지만 자신을 죄인이라 부르며 한 없이 스스로를 낮추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던 세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얻고 돌아갔습니다.

말씀 그대로, 높이던 자는 낮아지고, 낮추는 자가 높아졌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는 포함되지 않습니다만 뒤이어 나오는 15-17절 말씀도 결국 어린 아이와 같이 겸손하게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자가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 즉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받고, 천국을 소망하면서 그 기쁨의 삶을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의롭다 하심, 다시 말해 우리의 죄가 깨끗이 사해졌다고 인정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내가 여태껏 살아왔던 것으로요?

내가 벌어놓은 돈으로요?

내 스스로 떳떳한 양심으로요?

다 아닙니다.

내 명예, 부, 권력, 지식, 건강, 심지어 생명까지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다만 가슴을 치며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겸손하게 엎드릴 때 아니겠습니까?

처음 예수 믿을 때만이요?

아니요, 매일 매일 그렇게 엎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럴 때 여러분과 저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의 그 보혈이 우리를 감싸고 우리의 죄를 사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 쓰인 불쌍히 여기소서 의 본 뜻은 나를 속죄제물 같이 여겨달라는 말입니다.[8]

다시 말해, 나는 죽었습니다 라고 겸손하게 은혜와 자비를 구할 때 우리의 죄를 하시고 회복시키시는 사랑을 경험할 줄 믿습니다.

일회성이 아닌, 날마다 십자가 앞에서 속죄제물과 같이 죽는 여러분이 되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그래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세리와 같이 중생의 은혜를 성결의 은혜로 이어가시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1] 케네스 E. 베일리,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 고대 중동의 삶, 역사, 문화를 통해 본 복음서 trans., 박규태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6), 539.

[2] Biblical Studies Press, The NET Bible First Edition Notes (Biblical Studies Press, 2006), Lk 18:12.

[3] Ibid., 542.

[4] 윤철원, 누가복음, ed. 성결교회 성서연구원, 서울신학대학교 개교 100주년 기념 성서주석 (부천: 서울신학대학교 출판부, 2014), 470.

[5] J. Nolland, Luke 9:21-18:34 (Word Books, 1993), 876.

[6] Ibid.

[7] 성경전서(관주 해설)(Nkgo88ti)(개역개정판) (대한성서공회, 2009), 누가복음 18:11.

[8] 윤철원, 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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