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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016 개혁 – 눅 19:1-10


여러분, 개혁의 의미를 아십니까?

개혁과 혁명은 어떤 차이일까요?

“정치·사회적 변화 및 조직의 변화를 인위적으로 추진하는 것을 말한다. 자연적인 변화 또는 발전에 비해 변화의 속도가 빠르고, 인위적으로 추진되므로 개혁으로 인해 손해를 보는 집단의 저항을 유발하게 된다는 특징을 지닌다.”[1]

“개혁이 기존의 체제나 추세와 조화를 이루면서 부분적이고 한정된 변혁을 꾀하는 것이라면, 혁명은 기존의 사회제도 또는 정치체제를 전면적으로 변혁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개혁은 기존의 체제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사회적 모순을 제거하는 것이며, 이로써 기존체제의 붕괴를 방지하려는 것이다.”[2]

자연적인 변화보다는 인위적이고 적극적이되 혁명과 달리 기존 체계를 새롭게 하려는 움직임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개혁'이라고 할 때, 새로운 사상을 도입하는 것이라기보다 복음 진리에서 벗어난 왜곡되고 부패한 질서와 생활을 청산하고 철저하게 성경 중심으로 삶을 전환하고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back to the Bible)을 의미한다(느8-9장).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 이것이 종교개혁의 모토였다.”[3]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대학 교회 대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내걸면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습니다.

조금 전의 개혁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았듯이, 루터의 종교개혁 역시 교회를 없애거나 완전히 붕괴시키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돈으로 썩을 대로 썩은 교회의 부패성을 걷어내고 정말 성경이 말씀하시는 핵심,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신앙을 회복하자는 목적이었습니다.

당시 교회는 높은 값을 주고 성직자들의 자리를 사고 팔았고, 커다란 성당을 짓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 돈이 다 어디에서 나왔겠습니까?

시민들의 주머니를 긁은 거에요.

당시 라틴어로 되어 있는 성경을 읽지도, 알아듣지도 못하던 사람들은 교회에서 돈으로 티켓을 사면 죄가 사해진다는 말에 혹해서, 면죄부를 사게 됩니다.

루터는 교회의 이런 모습이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복음과 전혀 상관없음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구원은 어떤 행위, 특히 돈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렇기에 면죄부를 돈을 주고 사서 천국 가는 티켓을 산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죄에서 깨끗해 지고 구원 받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가능하다고 성경을 통해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돈과 권력의 맛에 길들여져서 부패한 교회를 루터는 변함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이키고자 했던 것이죠.

돈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썩게 했습니다.

마틴 루터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개혁을 일으키며 교회를 돈으로부터 되돌리려 했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여전히 교회가 돈의 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모습을 심심찮게 보게 됩니다.

돈은 참 강력합니다.

이 돈이 얼마나 강력한 가 하니, 성경도 돈/재물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눅 16:13)

예수께서는 사람이 돈을 하나님만큼의 가치를 둔다는 것을 아셨어요.

대체적으로 우리 사람은 하나님은 없어도 돈은 있어야 하고

당장 눈 앞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내 손에 움켜쥔 돈으로부터 받는 만족과 위로를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돈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할 만큼 강력하다는 겁니다.

한 예로, 누가복음 18:18-30에 한 관리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께 와서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겠냐고 물어요.

그래서 예수께서 계명에 대해 말씀하세요.

“너는 계명을 알고 있을 것이다. '간음하지 말아라, 살인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거짓으로 증언하지 말아라, 네 부모를 공경하여라' 하지 않았느냐?" (20절, 새번역)

그러자 이 관리가 말해요.

"나는 이런 모든 것은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 (21절, 새번역)

이 말을 듣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절, 개역개정)

하지만 안타깝게도 “예”라는 대답과 달리 이 사람은 매우 근심합니다.

큰 부자였거든요.

그 모습을 보시고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재물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 (24-25, 새번역)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하고 그 계명을 잘 지킨다고 하고 끝내 영생을 얻기 위해 물어왔지만 뭐에서 가로 막힙니까?

많은 재물이 그의 발목을 잡는 거에요.

이 부자 관리는 영생과 재물을 바꾸어 버린 겁니다.

여러분,

길어야 100년 사는 인생에서 돈이 중요합니까, 말 그대로 영원한 생명이 중요합니까?

돈으로 우리의 생명을 살 수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이야기는 뭐라고 말하는지 살펴볼까요?

예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십니다.

그 곳에 누가 살고 있습니까?

삭개오라는 사람이 사는데, 어떤 사람입니까?

세리장이고 부자였어요.

우리가 지난 주에 세리에 대해 공부할 때, 세리들은 회개조차 할 수 없는 큰 죄인으로 여겨졌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속인 사람이 하도 많아서 일일이 찾아 다니면서 용서를 구할래야 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들은 세금을 징수해서 그것을 로마 정부에 바쳤기에 로마의 앞잡이, 즉 우리의 역사로 말하면, 친일파 라는 비난을 들었고요, 그들은 로마 정부에서 요구한 세금보다 더 높은 세를 징수[하고 가로채서] 거의 자유롭게 자신들의 부를 늘렸습니다.[4]

오늘 이야기의 삭개오라는 사람은 세리장이라고 했으니까 이런 세리들의 우두머리였습니다.

그가 부자인 것은 어쩌면 당연했습니다.

이렇게 권력도 있고 돈도 있던 삭개오는 자기 마을을 지나가는 예수에 대해 궁금증이 일었습니다.

예수가 일으키신 기적에 대해 들어서 단순한 호기심이 생겼는지 아니면 자신의 인생에 대한 물음을 던져보고 싶었던 건지 우리는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만, 그는 예수가 어떤 사람인지 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하필 키가 작았어요.

보고 싶은데 사람들에 가려서 볼 수가 없어요.

재미있는 것은, 여기에서 삭개오에 대한 사람들에 인심이 드러난다는 점입니다.

한 신학자의 해설입니다.

“[삭개오]가 존경받는 사람이었다면, 군중은 당연히 이 부유하고 힘 있는 사람에게 ‘길을 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삭개오는 로마에게 부역하는 자였기 때문에 경멸의 대상이었다. 이런 부역자는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지 않는 이상 군중에게 길을 내달라고 요구할 수 없었다”[5]

막무가내로 길을 트고 들어갔더라면 아무도 모르게 등 뒤에서 칼에 찔려 죽을 수도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당시 사람들이 세리를 얼마나 싫어했는지 보여줌과 동시에 세리인 삭개오에게도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삭개오가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 군중 속에 있는 예수를 보고자 했던 것은 단순한 호기심에 의한 것은 아니었겠지요.

어쨌든 사람들 때문에 볼 수 없게 되자 삭개오는 마을 어귀에 있는 돌무화과나무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그 위로 올라가서 예수께서 그 곳으로 지나가시길 기다립니다.

나즈막해서 누구나 쉽게 올라갈 수 있고, 잎이 커서 자신을 가리기에 안성맞춤인 그 나무에 올라가 예수를 기다립니다.

돈과 권력을 가진 자가 할 수 없는 행동들, 어린 아이처럼 달려가고, 나무 위에 올라가는 모습에서 예수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그의 마음을 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런 그의 마음을 아십니다.

5절 말씀을 같이 읽어보실까요?

예수께서는 ‘숙소가 없는데 하룻밤 신세를 져도 되겠습니까?’ 라고 양해를 구하지 않으셨습니다.

분명한 어조로 명하셨고 상황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기 시작하십니다.

신기한 것은 삭개오의 반응입니다.

평소 악명대로라면 그의 돈과 힘을 의지해서 센 척도 해봤음직한데, 그는 그저 순한 양이 되어 예수의 말에 순종합니다.

부리나케 내려와서 정말 기뻐하며 예수를 자신의 집으로 모셔 들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지켜보던 마을 사람들은 부화가 치밉니다.

삭개오에 대한 미움을 예수에게 투영시키기 시작합니다.

7절에 보시면 예수께서 죄인의 집에 묵으러 들어갔다고 수군거리잖습니까?

이 말은 곧 예수를 죄인 취급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행하는 수 많은 기적과 기사를 보고 듣고, 또 그가 전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들으며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리던 그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이 미워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예수를 죄인으로 낙인 찍어 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오히려 삭개오에게는 긍정적으로 작용합니다.

모든 사람이 손가락질하는 자신의 집에 예수가 그 비난을 다 받으면서까지 와 있지 않습니까?

삭개오는 이런 예수에게 용기 있는 고백을 합니다.

8절을 같이 읽어보실까요?

이 고백을 통해 삭개오가 왜 예수를 만나고자 했는지 생각해 보시지요.

비록 적국의 수주를 받아 동포의 피를 빨아먹는 세리들의 우두머리였지만, 또 그렇게 부를 축적한 자였지만, 그는 이 돈들이 지긋지긋했던 거에요.

자신의 행동이, 자신의 삶이 죄로 얼룩져 있음을 그도 알았던 거에요.

벗어나고 싶었을 겁니다.

하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을 거예요.

자신을 인정해주고 받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 같아 하지 못했던,

즉, 자신의 삶을 개혁하고자 했던 그 의지가 예수를 만나 비로서 일어나게 된 겁니다.

만약 삭개오가 자신이 이야기 한대로 행동에 옮긴다면 그는 파산에 이를 가능성이 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고백을 한 것은 그가 더 이상 돈이 아닌 하나님을 바라보겠다는 굳은 의지의 표현인 셈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부자 관리의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했을 때 그는 고심했습니다.

그리고 끝내 이루지 못했어요.

하지만 여기 삭개오는 예수께서 그렇게 하라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자신의 소유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또 그 나머지로 빚을 갚되 4배로 갚겠다고 합니다.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지 못할 바에 재물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믿음을 갖고 계십니까?

이렇게 하나님을 택한 삭개오에게 예수께서는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9-10절 같이 읽어볼까요?

마을 사람 모두 삭개오를 죄인이라 비난했지만 예수께서는 그를 받아주셨고 삭개오는 구체적인 회개의 내용으로 이에 응답했어요.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에게 구원을 선포하셨어요.

세상 모든 사람이 옳다 해도,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도 모든 사람이 칭찬해도 예수께서 아니라고 하면 구원 못 받아요.

반대로 오늘 이야기에서처럼 세상 사람 모두 아니라고 해도 예수께서 인정하시는 사람은 구원받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분명하게 선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는 세상은 돈이 우리의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만이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데, 이 세상은 돈이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에요.

오히려 예수를 믿는 믿음보다 돈으로 평가 받으라고 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돈이 많으면 그것이 곧 권력이고 돈을 쥐어주면 무엇이든 가능해요.

세상 사람들이 옳다 평가하는 것은 곧 돈의 힘이에요.

지금 한국 정치/사회에 드러난 혼란의 중심에도 돈이 있어요.

그 중심에 있는 이들은 한 나라의 통수권자를 꼭두각시로 만들어 그 권력을 이용해 나라의 돈을 다분히 개인적인 목적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까지 자신들의 부를 축적해 놓았습니다.

개인적인 친분을 이용해 나라 법의 근간을 흔들면서까지 부를 즐기고 쾌락을 쫓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돈을 받은 사람들은 여전히 그들이 잘못이 없다고 감싸고 있어요.

법마저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돈의 힘입니다.

제가 개인적인 원한이나 정치적인 견해 때문에 그들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고요,

오늘 마지막절 말씀처럼 예수께서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셨는데, 그들도 의지하던 재물을 버리고 예수께 돌아오길 바랄 뿐입니다.

영생이 돈으로 얻어지는 겁니까?

오직 예수.

오직 예수만이 나의 주인이심을 인정하고 그의 뜻대로 살 때,

우리에게 영생이 선물로 주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삭개오가 자신의 재물을 다 내 버린 것처럼,

영혼을 갉아먹는 권력과 부의 자리에서 내려와 참회하고 죄의 값을 받고 차라리 영혼의 구원 얻기를 바랄 뿐입니다.

삭개오도 백성들을 억압하던 사람이었지만 주님을 만났을 때 구원을 받고 도리어 베푸는 자가 되지 않았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삭개오의 이야기는 돈이 영생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깨우쳐 주는 동시에

진정한 회개는 반드시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영생을 얻고 좁은 길을 따르는 것은

돈이 주는 편안함과 안락함과 힘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그 돈으로 가난한 자들을 섬기고 이로써 하늘에 보화를 쌓는 일임을,

그리고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기 위해 주의 말씀으로 날마다 자신의 삶을 개혁해야 하는 일임을[6]

기억하며 실천하는 여러분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1] 행정학사전, 이종수, 2009. 1. 15., 대영문화사

[2] 두산백과

[3] 교회용어사전 : 교회 일상, 2013. 9. 16., 생명의말씀사

[4] Anthony J. Saldarini and Mark Allan Powell, “Tax Collectors,” ed. Mark Allan Powell, The HarperCollins Bible Dictionary (Revised and Updated) (New York: HarperCollins, 2011), 1012.

[5] 케네스 E. 베일리,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 고대 중동의 삶, 역사, 문화를 통해 본 복음서 trans. 박규태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6), 277-8.

[6] “구원은 지금 매일의 삶의 철저한 변화와 개혁을 포함한다”; ibid., 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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