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616 막무가내-눅 20:27-38
아이들이 막무가내로 떼 쓸 때가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 제 아이도 제가 화장실에 있건 말건 막무가내로 자기 요구를 들어달라고 떼를 썼습니다.
물론 어른들도 막무가내로 떼를 쓸 때도 있습니다.
가장 단적인 예가 바로 국정 논란의 중심에 있는 최순실 씨 입니다.
권력과 힘을 믿고 막무가내로 자기 욕심을 부리던 그로 인해 나라의 법이나 규칙, 오랜 세월 쌓아온 관습과 전통, 민주 사회에서 추구해야 할 진리가 다 무너졌습니다.
더 이상 우리 사회가 막무가내가 아닌 규칙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되길 바랍니다.
이를 위해서, 책임질 사람들은 잘못대로 벌을 받고 후에 주께 돌아오길 바랍니다.
여러분께서도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위해 목소리를 내 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에 등장하는 사두개인들도 막무가내로 자기 목소리만 높이던 자들이었습니다.
“사두개파는 유대교의 귀족계급으로 대제사장을 배출한 가문이나 그들의 친인척들로 구성된다”고 합니다.[1]
지금으로 말하면, 아주 금수저들인 셈이죠.
이들의 출신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들은 권력과 아주 가까웠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권력을 이용해 돈을 버는데 익숙했고,
돈이 돈을 낳는다는 말처럼, 그들의 권력은 그들만을 위해서 더욱 견고하게 유지되었습니다.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할 종교지도자들임에도 불구하고 돈과 권력에 취해 성전에서 악취를 풍긴지 오래였습니다.
단적인 예가, 오늘 본문 앞 장인, 19장 끝 부분에 등장합니다.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45-46, 개역개정)
예수께서 십자가 고난을 받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오셨는데, 하필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와서 마주친 것이 장사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그저 평범한 노점상들이 아니었고요,
이들을 통해서 돈을 벌어들이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제사장들, 즉 사두개인들이었다는 겁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유월절이 가까워 왔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은 물론 해외에 사는 유대인들까지 유월절 제사를 지내기 위해 모였습니다.
문제는 멀리서 오는 사람들이 ‘흠이 없는’ 짐승을 데려오기가 너무 힘들었다는 거죠.
그래서 이들의 편의를 봐주는 척 하면서 성전에서 제사용 제물을 팔기 시작한 겁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제물을 그렇게 준비하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또 흠 없는 짐승을 결정하는 것은 제사장의 몫이었으므로 아무리 적합한 짐승을 가져왔어도 제사장이 안 된다고 하면 울며 겨자 먹기로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에게 사야 했던 겁니다.
그럼 당연히 그 돈은 장사꾼과 제사장이 나눠 갖는 거지요.
게다가 당시 통용되던 것이 로마 화폐였는데 로마 황제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는 이유로 성전에서 그 돈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당연히 그 곳에서만 쓸 수 있는 특별화폐가 사용되었는데 문제는 환전할 때 터무니 없는 환율이 적용되었다는 겁니다.
무려 10배가 넘는 폭리가 발생했다는데, 그럼 그 폭리는 누가 취할까요?[2]
제사장들, 사두개인들입니다.
그럼 이런 부조리를 고치려는 예수의 모습을 사두개인들이 가만히 보고만 있었겠습니까?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였더라” (눅 19:46-47, 개역개정)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하면 저 눈에 가시 같은 예수를 죽일까 고민하고 꾀를 내어 몇 가지 수를 놉니다.
누가복음 20장이 다 그렇게 함정을 놓는 이야기들인데요, 그 중 하나인 오늘 본문에서도 무서운 함정을 놓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두개인들은 어떻게 소개됩니까?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그들이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모세의 율법에서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문자로 기록된 모세의 율법만 따랐을 뿐 내려오는 이야기나 해석 등은 철저하게 배제했다고 해요.[3]
그런 그들이 부활에 관해 질문한다면서 찾아왔으니 이건 물음이 아니고 분명한 공격입니다.
이들은 지극히 유대적이고 율법적인 문제를 걸고 넘어집니다.
바로 형사취수혼이라는 제도인데요,
28절에 이야기하는 바와 같이, 형이 죽었을 때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이하여 그 첫 자식으로 하여금 형의 대를 잇게 하는 제도 입니다.
우리 사회의 통념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제도이지만 이동이 잦고 남자들이 전쟁이나 사냥에서 죽을 위험이 컸던 유목민들에게서는 종종 발견되는 풍습이라고도 합니다.[4]
사두개인들의 질문은 이겁니다.
그럼 만약 칠 형제가 한 여자와 결혼하였다가 죽고 그 여자도 죽었다면 부활 했을 때 칠 형제 중 누가 그 여인과 부부이겠느냐는 거죠.
“33. 일곱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단순히 질문만 놓고 생각한다면 참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이들이 예수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대단한 덫을 놓았습니다.
만약 예수가 이 제도 자체를 부정한다면 모세의 율법을 무시하는 결과를 낳는 것이고,
특정 사람의 아내가 된다고 답을 해 버리면 모순에 빠져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질문보다 그들이 믿지 못하는 부활 자체에 포커스를 맞추셨어요.
35절을 같이 읽어볼까요?
부활하면 결혼하는 일이 없습니다.
왜일까요?
36절 말씀에 답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시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5]
지구상의 모든 피조물은 자신과 닮은 후손을 남김으로써 그 존재를 이어왔습니다.
인류 역시 성인 여자와 남자가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그렇게 생명이 새로 태어남으로 인해서 계속 그 삶을 이어왔습니다.
나는 죽어도 내 자손을 통해 나의 생명이 계속 이어져 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회통념상 결혼의 기능 중의 하나가 바로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 내는 일입니다.
그것이 제도화되고 종교화된 것이 바로 유교의 제사인데요,
자손, 특히 아들을 통해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게 함으로써 그 생명을 이어간다는 대표적인 생각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부활 할 때에는 생명을 이어나갈 매체나 수단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어지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 삶이 영원히 계속되니까요.
그리고 이 영원한 삶을 하나님께서 보장해 주십니다.[6]
37-38절 말씀을 같이 읽어볼까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시는 장면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출 3: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토록 살아계신 분이시기에 아브라함의 하나님도 되고 그 손자 야곱의 하나님도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예전에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셨지만 지금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즉, 아브라함의 육신은 죽었지만 그는 여전히 살아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말입니다.[7]
그래서 하나님 역시 38절 말씀처럼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오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 이십니다.
다시 말씀 드리자면, 우리가 부활할 때는 결혼할 필요가 없는데 그것은 자손이 우리의 삶을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영원히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바로 영원히 살아계시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렇다면 이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떻게 이어갈 수 있습니까?
롬 6:8-11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이어가고 이로써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부활에 대한 참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시는 여러분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다보니, 사두개인들이 부활에 반대하던 이유가 다시 한 번 드러납니다.
모세의 율법에 문자로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자손을 통해 생명이 유지되듯 그들의 권력이 계속 유지되길 바랐기 때문입니다.[8]
그들에게 죽음 이후의 삶은 없고 단지 지금 현재의 삶, 그리고 권력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부활은 그들에게 소용없었습니다.
그렇게 부활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그들은 비논리적인 질문으로 예수를 곤경에 빠뜨리려고만 했습니다.
자신들은 믿지도 않는 부활을 소재로 자신들의 권력 유지에 걸림돌 같은 예수를 제거하려고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부정하는 꼴이 되고 만 것이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라고 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영원히 다스리시고 관계를 맺고 싶어하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그들은 결국 그들 스스로를 하나님도 모르고 성경도 모르고 율법도 이해하지 못한 자들로 옭아매 버렸습니다.
막무가내로 자신들이 옳다고 우기며 싸움을 걸었던 사두개인들은 결국 코가 납작해졌습니다.
예수 앞에서는 더 이상 막무가내가 통하지 않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예수께서는 사두개인들이 부인하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고전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여러분!
이 세상이 아직도 막무가내가 통하는 세상이라고 해서 우리 역시 막무가내로 우리 욕심을 이루기 위해 권력과 명예와 부를 쫓아가야 하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맡겨진 소명을 감당하되, 미련을 갖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첫 열매 되시는 주님 따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영원한 삶을 소망하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세상의 어떤 논리로도,
어떤 권력과 목소리로도,
무너지지 않을 하나님 나라의 진리,
바로 그 부활의 소망이 여러분의 것이 되길 축원합니다.
[1] 윤철원, 누가복음, ed. 성결교회 성서연구원, 서울신학대학교 개교 100주년 기념 성서주석 (부천: 서울신학대학교 출판부, 2014), 525.
[2] namu.wiki/w/%EC%98%88%EC%88%98%EC%9D%98%20%EC%84%B1%EC%A0%84%20%EC%A0%95%ED%99%94
[3] 성경전서(관주 해설)(Nkgo88ti)(개역개정판), (대한성서공회, 2009), 용어해설 27.
[4] http://blog.donga.com/thbae/archives/584
[5]“Instead of saying flatly, “they cannot die anymore,” several witnesses (chiefly Western) soften the statement by using μέλλουσιν (“they will not die anymore”).; Bruce Manning Metzger, United Bible Societies, A Textual Commentary on the Greek New Testament, Second Edition a Companion Volume to the United Bible Societies’ Greek New Testament (4th Rev. Ed.) (London;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1994), 146.
[6] 윤철원, 527.
[7] John D. Barry et al., Faithlife Study Bible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12, 2016), Lk 20:38.
[8] 윤철원, 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