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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316 다 무너져도 – 눅 21:5-19


지난 주간 전 세계의 이목이 미국으로 쏠려 있는 가운데 도널드 트럼프가 제 45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일부에서는 ‘정치 이단아’의 파란이라고도 하고요, 숨어있던 백인들의 반란이라고도 말합니다.

트럼프가 유세 기간 내내 막말을 쏟아내고 거액의 탈세 혐의를 받고 있고, 특히 성이나 민족에 대해 차별적인 입장을 보인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싫어합니다.

얼마나 싫어하는지 특히 할리우드 연예인들 중 몇몇은 트럼프가 당선되면 종말이 온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하거나, 미국을 떠나겠다고 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고 해서 정말 지구의 종말이 오겠습니까?

들쑥날쑥한 그의 성격 탓에 미국의 통치 방향을 좀처럼 예상할 수 없긴 하지만 그가 대통령이 된다고 미국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굳이 남의 나라 이야기할 것도 없지요.

우리 나라도 매우 혼란합니다.

어제도 100만 명의 사람들이 청와대 주변에 모여서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습니다.

정치권에서는 시위에 합류하기도 하고 민심을 반영한다며 이런 저런 말을 하지만 여전히 얼마나 더 많은 비리가 숨어 있는지, 앞으로 국정이 어떻게 흘러갈지 막막할 따름입니다.

이렇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혼란스러운 것은 사실이나 분명한 것은 지금 당장 이 대한민국이 무너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보면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의 종말을 말씀하시는데 그에 앞에서 혼란스러운 징조들이 있겠지만 그 징조들 자체가 끝을 말하는 것 아니라고 하십니다.

오늘 본문 5-6절에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것을 예언하셨어요.

6절을 한 번 읽어보실까요?

이 말씀대로 예수께서 하늘로 다시 올라가시고 40년이 채 지나기 전, 그러니까 서기 70년 로마군의 공격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무너집니다.

5절 말씀대로 사람들은 이 성전을 칭찬하기 마지 않았어요.

이 성전은 헤롯왕이 솔로몬 왕이 지은 것 보다 더 화려하고 웅장하게 지었기 때문에 5절에서와 같은 사람들의 반응은 당연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랑스러워하고 칭송하던 이 성전이 그렇게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무너졌을 때 얼마나 절망스러웠겠습니까?

말 그대로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지 않았겠습니까?

단순히 아름다운 건물이 무너졌다는 것을 넘어서서 그 성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종교, 정치, 문화마저도 다 무너졌다고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는 성전이 무너질 것을 예언하셨을까요?

방금 말씀 드린 것과 같이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증명하는 상징적인 건물인 동시에 그 곳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던 거룩한 곳인데 말입니다.

한 신학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당시 성전이 ‘하나님이 정하신 역할, 곧 이방 나라를 향한 증인 역할을 성취하는 곳이 아니라…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자기 백성을 지키고 모으시리]라는 미신적인 신앙의 으뜸가는 상징이 되었기’ 때문이다”[1]

다시 말해, 하나님이 성전을 짓게 하시고 백성들로 하여금 그곳에서 예배 드리게 하신 가장 큰 이유는

그 성전 중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이시고 얼마나 위대한 일들을 행하셨는지 증거하게 하신 것인데

그런 역할은 나 몰라라 한 체 그저 자신들만 지켜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성전을 드나들었다는 거죠.

그러다 보니 증인의 역할 보다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미신적인 요소들을 가미하게 된 것이고요.

예수께서 성전 뜰에서 짐승을 팔고 있는 자들을 내어 쫓으신 것도 성전이 더 이상 그 기능을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쨌거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중요하디 중요한 성전이 무너진다는 것은 매우 충격적인 사실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근심 어린 마음으로 묻습니다.

‘이런 일들이 언제 일어나고 그 전에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

징조를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답하시면서 예수께서는 세 가지의 일을 말씀해 주십니다.

우선, 사람들을 헷갈리게 할들이 일어난다고 말씀하십니다.

8절 같이 읽어볼까요?

한 두 명도 아니고 많은 사람이 ‘내가 예수다’라고 소리치면서 멸망이 가까워왔다고 자신들을 따르라고 할 거라는 겁니다.

일부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다는 것, 즉 자신들의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 같은 상황에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들을 따르려 했을 겁니다.

하지만 주께서는 오히려 그들을 따르지 말라고 경계하십니다.

또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는 것 중의 하나가 ‘난리와 소요의 소문’ 입니다.

난리라는 것은 전쟁을 말하고요, 소요는 소동, 폭동 등을 이르는 말입니다.

한 번 전쟁과 폭동에 대한 소문이 들리기 시작하면 어떻습니까?

사실 관계를 확인할 시간도 없이 사람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로마에 의해 이미 점령당한 상태였기에 언제 다시 전쟁이 일어날지, 로마에 대항한 폭동은 또 언제 일어날지 늘 긴장하고 있었을 겁니다.

요즘처럼 통신이 발달되어서 쉽게 확인해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난리와 소요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면 누구든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민족 간, 나라 간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 하셨고

큰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 기근, 전염병이 있을 것이라고 하시면서 하늘에서 일어나는 징조들로 인해 큰 두려움이 임할 것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10-11절).

10-11절의 경우 다소 묵시적인 표현이긴 합니다만

기근의 경우 실제로 예루살렘에 큰 기근이 여러 차례 있었고 이로 인한 고통이 컸다고 여러 문건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2]

하지만 주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9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거짓 메시야, 구원자들이 나타나고 전쟁과 소동의 소문으로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할지라도 쓸데없이 따라 나서거나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분명 끝은 아니라고요.

이것이 성전의 종말에 대한 직접적인 징조들이었다면

이 일들이 있기 전, 그러니까 오늘 본문 8-11절의 일들이 있기 전에 또 다른 일들이 일어난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믿는 자들을 향한 박해와 핍박입니다.

12절을 같이 읽어보실까요?

공권력에 의한 복음 전파자들의 박해를 말씀합니다.

16절도 읽어볼까요?

개인적인 관계 내에서도 핍박을 받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권력자들 앞에서, 그리고 심지어는 가족들과 친구들 앞에서 박해와 멸시를 받게 된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길,

권력에 의해 박해를 받더라도 이것이 오히려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고 하십니다.

오히려 무엇을 말할지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도행전 6장에 스데반 집사의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기사와 표적을 행하며 복음을 전하는데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들이 찾아와 논쟁을 벌입니다.

하지만 감히 그들이 스데반의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당하지 못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행 6:10)

그러니까 오히려 사람들을 돈으로 매수해서 거짓으로 스데반을 공격하고 공회로 끌고 옵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스데반은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행 6:15)

오늘 본문 15절 말씀처럼 ‘구변과 지혜’를 주시겠다고 한 약속이 스데반을 통해서 반증되었습니다.

가족들에게 핍박 받을 때에라도 걱정하지 말 것은 예수 이름으로 인해 미움을 받더라도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게 하시겠다는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18절 같이 읽어볼까요?

12-18절까지의 박해와 핍박의 상황, 그리고 이 것을 견디어 내는 제자들의 모습은 스데반 집사의 이야기와 같이 사도행전에 아주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시고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하던 제자들과 사람들은 성령 충만하여 거리로 나갑니다.

유대인들과 공회의 핍박과 박해, 그리고 여러 자연 재해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그들의 복음의 행진은 예수께서 부탁하신 대로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그리고 땅 끝이라 여겨졌던 로마에 이르기까지 멈추지 않고 계속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오늘 본문 19절의 의미를 자연스레 깨닫게 됩니다.

만약 주의 제자들이 성전이 무너진다는 걱정에 사로잡혀서 가만히 있었다면,

혹은 많은 사람들이 내가 예수다 라고 할 때마다 미혹되어서 우왕좌왕 따라다녔다면,

또는 난리와 소요가 있을 때마다 두려워하여 도망 다녔다면,

아니면 권력자들이 예수의 이름을 더 이상 전하지 말라고 할 때 무서워서 정말 입을 닫았다면,

가족들과 친구들이 손가락질 할 때 부끄러워서 더 이상 예수의 이름을 전하지 않았다면,

과연 그들에게 무엇이 남았을까요?

그들이 그렇게 인내하지 못했다면 남들은커녕 그들의 영혼이 구원을 얻을 수 있었을까요?

히브리서에서는 견디는 인내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히 10:36-39)

한 관주 성경의 해설에서 이 부분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인내는 수동적으로 참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꿋꿋하게 견디어내는 것을 뜻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것이며, 마지막에 상을 받는다. 의인은 하나님께 신실성을 유지하는 사람이다.”[3]

저는 오늘 말씀의 핵심이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다’가 아닌 예수님의 그 다음 말씀에 있다고 봅니다.

즉,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기 전에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벌어질 일들, 그리고 그에 대해 가져야 할 자세가 더욱 중요합니다.

방금 나눈 것처럼 혼란과 혼돈의 세상 속에서 어떻게 인내할 것인가, 미혹하고 소란스럽고 누구 하나 의지할 곳 없는 이 세상에서 오히려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 앞에서 신실하게 인내할 수 있겠는가 에 대해 예수께서 일러주고 계시는 겁니다.

결국 예수의 말씀처럼 예루살렘 성전은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무너졌지만

그 과정에서 있었던 많은 혼란과 동요와 미혹과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인내한 제자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전파되었습니다.

그럼으로 인해 더 이상 없어져 버린 성전이 아닌 눈에 보이지 않지만 더 강력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져 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교회가 바로 그 증거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참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종말의 징조들이 오늘날의 이야기인가 싶기도 합니다.

신천지나 하나님의 교회 등 많은 이단들은 자신들의 교주가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고,

나라를 다스리는 자들은 국민이 맡겨준 의무를 다하기보다 그 권한으로 나라를 혼돈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도 서로의 모습에 실망하여 외면하고 교회를 떠나기 일쑤고

세상은 목사를 비롯해 교인들의 올바르지 못한 모습을 보면서 개독교라고 욕합니다.

이런 모습들을 통해서 세상이 종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음은 분명 깨닫게 되지만 아직 끝은 아니라는 주님의 말씀을 되새겨 봅니다.

그렇기에 동시에 우리가 새겨야 할 주의 말씀은

걱정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이 아닌 인내로 우리 영혼을 붙잡는 것 아니겠습니까?

조금 전에 보았던 성경 해설처럼, 수동적인 자세로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앉아있는 사람에게 인내라는 말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혼란한 세상을 향하여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기준이라고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이 인내로 영혼을 얻는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 심지어 가족과 친구들마저 외면해도 예수님만을 사랑한다고 처절하게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인내로 영혼을 얻는 사람입니다.

성전이 무너지는 것처럼 내 삶의 모든 희망이 무너지는 것 같을 때에도 예수만의 내 삶의 빛이요 소망이라고 눈물로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인내로 영혼을 얻는 사람입니다.

부패한 세상 권력자들 앞에서 굽신거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를 과감히 지적하고 기도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인내로 영혼을 얻는 사람입니다.

다 제멋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이 시대 속에서 예수와 한 마음을 가지고, 그 마음을 온 성도들과 동일하게 나누고, 역시 이웃들과 한마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꿈꿀 수 있는 사람이 인내로 영혼을 얻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인내로 영혼을 얻어 마지막 날 기쁨으로 주님을 뵙는 여러분 되시길 간절히 원합니다.

[1] 비일그레고리 K, 성전 신학 (새물결플러스, 2014), 238-9.

[2] 요아킴 예레미아스, 예수 시대의 예루살렘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1-3

[3] 성경전서(관주 해설)(Nkgo88ti)(개역개정판), (대한성서공회, 2009), 히 10:3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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