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016 “죽음으로 살리신 주께 감사를!” 눅 23:33-43
나라가 많이 혼란스럽습니다.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결실의 계절이고 추수의 감사를 해야 할 계절이지만 우리 주변에서 감사의 소리를 좀처럼 들을 수 없습니다.
반면 탄식의 소리는 곳곳에서 흘러나옵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으로써 나라의 주인인 국민이 투표를 통해 국민을 위해 일할 사람을 뽑아놓았지만, 지금의 대통령과 나라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왕이라도 된 마냥 나라를 어지럽히고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고 있습니다.
이번 사태를 보면서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은,
자신을 털 끝만큼도 희생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권력을 잡으니까 나라가 큰 혼란을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내가 죽지 않는 리더십은 결국 다 같이 죽자는 꼴이 됩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앞서 가는 사람이 죽기로 결단하면, 뒤에 따라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 공동체의 사람들은 같이 사는 겁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이 놀라운 진리를 몸소 보여준 위대한 왕에 대해 이야기 해 줍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는 예수를 태초부터 말씀으로 계셔서 천지를 함께 지은 분이라고 소개합니다.
마가복음 1장에 의하면,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갈라지면서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오고 그를 가리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하는 하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마태복음 1장은 예수께서 유대인의 아비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후손이고, 가장 추앙 받는 왕 다윗의 후손임을 또한 말하고 있습니다.
또 예수가 어떤 분이냐 하면, 눈먼 자를 보게 하시고, 못 듣는 자를 듣게 하시고, 불치병을 고치시고, 앉은뱅이를 일으키시고,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나사로를 살리신 분입니다.
뿐만 아니라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이로 남자만 오천 명이나 되는 큰 무리를 먹이셨고, 어떤 뛰어난 선생도 감히 예수 앞에서 지혜를 자랑하지 못했으며, 그를 향해 예언되었던 구약 말씀 어느 것 하나 안 이뤄진 것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놀라운 분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거에요.
잔인하기로 소문난 로마의 처형법 중에서도 악명 높기로 소문난 십자가형.
너무 무섭고 끔찍해서 정작 로마 시민들에게는 내려지지 않았던 처형.
이 십자가 처형을 지금 예수께서 받고 계시는 겁니다.
이 분이 죄가 있어서 이런 저주의 나무에 달리셨을까요?
오늘 본문 앞에서 예수를 심문하던 빌라도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눅 23:22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니”
오늘 말씀에서도 너와 나를 구원하라는 행악자의 조롱에 대해 다른 행악자가 꾸짖으면서 한 말이 있습니다.
40-41절을 같이 읽어볼까요?
그 분은 십자가에 달려서 죽을만한 죄가 없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십자가에 달렸습니까?
막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자신의 목숨을 대신 내어주려고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 천지에 돈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목숨을 살 수 있습니까?
당장 이 썩어질 육체의 목숨도 보전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영원한 생명의 값을 치를 수 있습니까?
우리가 할 수 없는 그것을 예수께서 대신하신 겁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값을 스스로 해결할 수 없지만 예수께서 대신 저주의 십자가에서 대속물, 즉 대신 우리의 죄값을 치러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기회를 얻었고, 천국을 소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최근에 이런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예수와 동시대에 살았던 어떤 사람이 병자도 일으키고 심지어 죽은 자도 일으켜 세웠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가 되지 못했어요.
왜냐하면 그가 다른 이를 위해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살리기 위해 죽은 분이십니다.
그 분은 저와 여러분을 살리기 위해 죽으신 분입니다.
그 분이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악한 원수, 사탄마귀의 모든 힘과 계략은 무너지고 예수의 나라가, 그리고 그의 통치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 옆에 매달린 행악자는 이것을 알았어요.
42절 말씀입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이 말은 곧 “당신이 당신의 나라를 가지고 오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해석되기도 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님! 비록 당신이 지금 이렇게 내 옆에 나와 같은 처지로 십자가에 매달려 있지만 나는 압니다.
당신이 그리스도 임을 나는 압니다.
당신이 나를 구원할 능력이 있음을 나는 압니다.
당신을 향해 비아냥거리고 조롱을 퍼붓는 자들의 말과 상관없이 당신이 영원한 나라를 이뤄갈 줄 나는 압니다.
나는 당신의 영원한 통치를 믿습니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또한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이렇게 놀라운 구원의 역사와 왕의 통치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된다고요?
죽음에서부터 입니다.
자신의 손으로 빚은 피조물인 우리 인간을 위해 목숨을 버린 그 겸손과 사랑이 바로 이 위대한 구원의 역사이자 그리고 왕의 위대한 통치 그 자체 입니다.
그렇기에 예수의 이 죽음은 우리에게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감사 제목입니다.
그럼 예수의 이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는 최고의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를 본 받아 죽는 겁니다.
내가 죽지 않으면 감사가 쉽게 나오지 않습니다.
제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만, 제가 요 며칠 그런 모습이었어요.
개척한 지 1년이 되어가면서 목회 결과에 대해 생각하니까 괜히 조급한 마음도 들고, 불평과 불만이 막 일어나더라고요.
마치 사춘기 소년처럼 괜히 가족들한테 쉽게 짜증을 냈다가 하면서 제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겠더라고요.
그런데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또 가족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조금이나마 깨닫게 된 것은,
제가 죽지 않았기 때문에 힘들어 하고 있지는 않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뜻대로 목회 하기 위해 내가 더 죽었더라면…
내 생각과 내 편의와 내 자존심을 내세우기 보다, 내 지식 내 경험 의존하기보다 예수님의 뜻대로 내가 죽었더라면…
이 것을 생각하고 나니까 제 속에서 일어나던 짜증과 조바심과 걱정들이 다 부질 없더라고요.
그렇게 제가 죽지 않았기 때문에 가지고 있던 걱정들과 두려움들이 사라지면서 제 안에서는 감사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아직도 불완전하고 연약합니다만,
내가 예수 안에서 죽음으로써 왕이신 예수의 통치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고 이로써 더욱 감사할 수 있다는 진리를 저는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 절기 헌금을 통해 이웃을 돕기로 한 일도 마찬가지 입니다.
오늘 날 한국의 교회들이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는 것은 다는 아닙니다만 몇몇 교회들이 너무 자신들의 배만 불리기에 급급했기 때문이거든요.
교회의 시설을 좋게 하고, 목회자들의 배를 불리고… 네, 좋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교회를 위해서만 돈을 사용하고 또 그러기 위해서 돈이 교회 안에서 쌓이다 보면 그 돈에서는 결국 썩은 내가 나게 되어 있어요.
돈에 대한 욕심을 버리면, 다시 말해 돈에 대해서 죽으면, 그 돈은 자연스럽게 이웃에게 흘러가게 되어 있어요.
돈이 전부는 아니지만 그 돈을 통해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되요.
그 돈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더 풍성한 감사를 나눌 수 있게 되요.
비록 우리 아직 작은 개척교회이고, 큰 규모의 나눔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린 헌금들이 모여져서 다시 이웃을 위해 쓰여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는 하나님이시지만 자신을 버리셨고, 그 놀라운 희생으로 인해 지금도 하나님 앞에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인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십니다.
왕이신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음으로써 우리를 위한 구원을 완성하셨음을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을 본받아 우리도 죽을 것을 말씀하시니 또한 감사합시다.
불평과 불만으로, 삶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으로, 돈에 대한 욕심과 불의에 대한 침묵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두 번 못 박는 자들이 되지 말고 감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주의 영원하신 통치를 여러분 개인의 삶과, 가정과, 이 사회에 선포하는 복된 성도들 되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