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516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 눅2:8-20
이 시간 함께 말씀을 나눌 때 성탄의 기쁨이 이 자리에 모인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할 줄 믿습니다.
여러분 저 앞에 있는 초가 보이십니까?
저 초들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물론, 단순히 성탄절 데코레이션은 아닙니다.
대림절이 시작된 11월 27일부터 초가 한 개씩 켜졌고, 오늘은 가운데에 있는 흰 초까지 5개가 모두 켜졌습니다.
첫번째 초는 예언의 초(희망의 초), 두 번째는 베들레헴의 초(평화/준비의 초), 세 번째는 목자들의 초(기쁨의 초), 네 번째는 천사들의 초(사랑의 초)를 의미한다고 합니다.[1]
초를 하나씩 켜 가면서 주님을 기다리는 절기인 이 대림절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절정으로 가운데에 있는 하얀 초에 불을 붙입니다.
이것은 곧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빛으로 오셨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말씀에서 증거하길,
요 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있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빛으로 세상에 오셨음을 말씀합니다.
예수 스스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 8:12)
예수를 따르면 어둠에 다니지 않고 생명을 얻는다는 말씀은 곧 예수의 빛이 어둠을 물리친다는 말씀입니다.
빛이 어둠을 물리친다는 사실은 다시 한 번 요 1장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요 1:4-5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한편, 이 말씀을 새번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
이렇게 어둠을 물리치고 생명을 주시는 참 빛,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뻐하고 그의 빛이 우리 가운데 영원히 함께 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리고 다시 우리에게 속히 오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 초를 켭니다. (실제 초 켜기)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방금 성경에서 본 것과 유사한 이 말을 요즘 자주 들을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광화문 광장입니다.
차디찬 바다에서 꽃다운 나이의 아이들을 비롯한 국민 304명이 죽어가는 동안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가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밝혀달라고 외치면서 이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릅니다.
어둠은 더 짙은 어둠을 원합니다.
자신의 죄를 가릴 더 까마득한 어둠을 원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무서운 어둠이라고 해도 빛이 비추면 그 어둠은 사라지고 맙니다.
이 혼란한 정국의 끝에서 우리는 반드시 어둠에 감쳐줬던 진실들이 밝은 빛 아래 드러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이천 년 전 이스라엘 한 광야에서도 한 빛이 어둠을 물리치며 나타났습니다.
목자들이 양 떼를 지키고 있는 그 밤에 천사들이 나타납니다.
목자들을 둘러싸고 있던 어둠이 물러가고 주의 영광이 대신 그들을 비춥니다.
두려워 떠는 그들에게 천사가 말합니다.
10-12절을 함께 읽어보실까요?
천사의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황홀한 광경이 펼쳐집니다.
13-14절도 같이 읽어볼까요?
10절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한 마디로 ‘복음’ 입니다.
왜 복음입니까?
구주가, 그리스도 주가 나셨는데, 누구를 위해서라고 합니까?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신 것이 왜 목자들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되었을까요?
우리가 예전에 함께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만, 당시 목자들은 매우 천대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염치가 없고 도벽도 심하다고 평가되었습니다.
자신들의 가축을 남의 땅으로 함부로 몰고 다니기도 했고 가축의 소산, 즉 양털, 우유, 새끼 염소를 팔 때 바가지를 씌우는 것으로 유명했다고 합니다.[2]
그렇기에 그들은 시민으로서의 기본적인 권리를 인정받지 못했는데, 단적인 예로, 법정에서 증인으로 설 수 없었습니다.[3]
즉, 이 목자들은 어둠 속에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양떼를 먹이기 위해 방랑하는 삶을 살았고
사람들의 멸시와 천대를 받았으며
그 때문에 돈을 벌려고 해도 쉽지 않은, 즉 늘 가난과 싸워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증인이 될 수 없는, 즉 어느 누구도 그들의 말에 귀 기울여주지 않는 사람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살았던 설움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을 위해 구원자나 나신다고 천사가 말하고 있습니다.
누구도 가까이하기 싫어하는 그들을 위해서 말입니다.
천사의 말에, 너희가 가서 보면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볼 텐데 이것이 표적, 즉 징표가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베들레헴으로 달려가서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습니다.
실제로 보니까 어떻습니까?
천사의 말대로 한 아기가 강보에 쌓여서 구유에 뉘여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강보로 싸는 것은 목자들이나 농부들이 갓난아기에게 하는 일이었다고 합니다.[4]
그리고 추운 날씨로 동물이 죽거나 도난 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밤에는 가축들을 집 안으로 들여놓았는데 그 때 사용하던 바로 그 구유에 그 아기가 뉘여 있던 겁니다.[5]
그 누구도 그 아기를 찾아온 목자들에게 경멸의 눈초리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 누구도 당장 여기서 나가라고 소리지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목자들이 천사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할 때, 사람들이 신기해하며 또는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며 귀를 기울였습니다.
천대받던 목자들이 예수 탄생의 첫 번째 증인이 된 셈입니다.
누구도 증인으로 이 목자들을 세우지 않았지만 그리스도 구주의 탄생은 이들의 입을 통해 증거되었습니다.
베일리 목사는 목자들이 자신들이 들은 바를 아무 거리낌 없이 증거할 수 있고, 그들이 들은 바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들이 받은 징표라고 설명합니다.[6]
자신들과 같은 모습으로,
아니 그보다 더 연약한 모습으로 누워있지만 오히려 평화로운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얼마나 위로를 느끼고 기쁨이 가졌을까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구유에 뉘여 있는 아이의 평화는 이미 이 목자들에게도 임했습니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여 있는 구주를 만난 그 기쁨은 빛이 되어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어둠을 물리쳤습니다.
어둠에 사로잡혀 있던 그들이 빛을 만난 그 기쁨은 이내 하나님께 대한 영광과 찬송으로 바뀌었습니다.
2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천년 전 이 땅에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목자들을 위해서만 오신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 자리에 모인 우리 모두를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 모든 인류와 당신의 모든 피조물을 위해 오셨습니다.
다만 어둠에 있는 자들은 그 빛을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를 위해 오셨다는 말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우리를 가난에서 건져서 부자가 되게 하시려고 오셨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목자들은 아기 예수를 만난 후에도 여전히 목자였습니다.
명예와 권력을 주시려고요?
마찬가지로 목자들은 여전히 목자였습니다.
다만 바뀐 것은 무엇입니까?
하늘 천군 천사들의 찬송이 목자들에 입을 통해 계속된 것입니다.[7]
멸시와 천대, 설움과 가난에 찌들어서 어둠에 갇혀 있던 그들의 입에서 하늘 찬양이 이어지는 거에요.
그리스도 주께서는 바로 그런 평강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죄 중에 빠져 어둠을 헤매고 다니던 우리가,
그래서 하나님과 원수된 채로 우리의 욕심만을 쫓아 살아가던 우리가,
하나님과의 막힌 담을 헐고 그의 빛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그래서 그 하늘의 평화를 영원토록 누릴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셨어요.
네, 돈 중요합니다.
힘도 있어야 하고, 지식도 잘 쌓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인생살이 가운데서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서 어둠을 물리치는 빛이시요 평강의 왕이시라는 사실입니다.
당장은 돈 없어서 힘들고,
가진 것 없고 힘이 없어서 설움 당할지라도,
빛이시요 평강의 왕이신 예수의 손을 꼭 잡고 인생길 걸어간다면,
마지막 날, 우리를 빛으로 감싸 안고 잘했다고 칭찬하실 주님 바라보면서 이겨낼 수 있는 거에요.
이 놀라운 진리가 2016년 마지막 주일이자 성탄인 오늘, 사랑하는 모든 성도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1] http://likumc.org/cp/?p=17265
[2] 요아힘 예레미아스, 예수시대의 예루살렘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08), 384-5.
[3] Ibid., 391-2.
[4] 케네스 E. 베일리,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 고대 중동의 삶, 역사, 문화를 통해 본 복음서 trans. 박규태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6), 57.
[5] Ibid., 47.
[6] Ibid., 57.
[7] 성경전서(관주 해설)(Nkgo88ti)(개역개정판), (대한성서공회, 2009), 눅 2:20 해설.